때리고 가로막고 받고
때리고 가로막고 받고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김길웅 칼럼니스트

질병 난리 통에 집콕하며 여자배구대표팀에 쏠렸다. 잊히지 않는 도쿄올림픽, 한일전 그 장면.

그새 굴곡이 있었기로 긴장됐다. 이탈리아에서 열린 발리볼 네이션스 리그(VNL)에서 한국은 참가국 16팀 중 15위였다, 세계의 벽은 높았다. 장신들 앞에 때리고 막지 못했다. 기도 쓰지 못한 채 연속 무릎을 꿇었다. 응원하다가도 멋쩍었다. 심지어는 중국·일본에게도 3:0 완패해, 동네북이 됐다. 딱했다.

한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기사회생한 것이다. 잠재적 기대감 때문일까. 한 달여 만에 도쿄 올림픽이 열려, 경기를 시청하게 됐다. ‘혹시’ 했던 게 ‘역시’였다. 그것은 놀라운 파장이었다. 예선 1차전에서 강호 브라질을 만나 셧아웃 되면서, 이젠 절망의 늪에 빠지는구나 했는데, 반전했다. 케냐를 꺾고 도미니카공화국를 연파하더니 숙적 일본을 잡아내질 않는가.

막판 8강전에서 세계랭킹 4위 터키를 무너뜨리면서 4강 진출이란 엄청난 탑을 쌓아 올렸다. 파죽지세였다. 올림픽 4강이라니, 웬 저력이 폭발했나.

험난했던 이 과정에서 나는 한국인의 DNA를 눈으로 보았다. 조급해도 끝까지 해내는 똑 부러진 근성. 우리 선수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해보자, 후회하지 말자!”고 외쳐댔다.

여제 김연경은 출중했다. 192cm 장신에 내공으로 축적된 기량이 추종 불허였다. 스파이크를 때리고, 장신의 공격을 가로막고, 날아오는 총알 같은 공을 받아 올렸다. 그를 중심으로 하나된 우리 선수들의 뒷심은 놀라웠다. 도무지 한 달 전의 한국이라고 믿기지 않았다.

가위 바위 보도 져선 안되는 한일전, 주춤주춤 흔들리는 고비마다 강타로 상대 코트를 뒤집어 놓는 김연경은 결연했다. 그 앞에 일본이 안방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잠을 쫓아내 응원했다.

경기는 2:2에서 풀세트까지 갔다. 김연경 선수가 장대 같은 몸을 코트로 내던질 때, 무서운 집념이 엿보였다. 몸을 던져 공을 건져 올리는 순간, 화살같이 공에 꽂히던 두 눈빛. ‘일본에겐 질 수 없다’는 결의에 차 있었다. 혈투였다. 급기야 11:14, 일본의 매치포인트. 숨이 막히는 순간, ‘아, 놓치는구나.’ 했다. 한데 공격 성공에 상대의 범실로 내리 3점을 가져와 듀스. 마지막 쳐내기로 일본을 눌러 4강 진출을 확정 지었다. 우리 선수들은 도쿄에서 강강술래를 신나게 추었다. 승전고가 현해탄 건넌 깊은 밤, 우리는 기분 좋게 잠을 설쳤다. 감격적인 승리였다.

한 달 전 이탈리아에 섰던 팀이 아니었다. 8강전까지 줄달음쳤다. 배구 강국 터키가 어디 호락호락한가. 그도 아니었다. 풀세트 접전 끝에 4강전까지. 갈 데까지 갔다. 격침당한 거함, 터키. 눈물 그렁그렁하던 하얀 얼굴들이 떠오른다. 자리를 뜰 줄 모르고 벽에 기댄 채 눈물을 흘리는 선수도 있었다. 한낱 배구 경기가 아닌, 애국심의 발로였다.

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강하게 넘어오는 공을 받는 게 득점의 시작이었다. 못 받으면 흩어진다. 그게 배구다. 디그, 이게 안되면 조직이 쪽 못 쓰고 뿌리째 뽑혀 쓰러지고 만다. 김연경은 공격 못잖게 수비도 단단했다. 한 번도 사리지 않고 제 몸을 던졌다. 팀이 살아나 다들 신들렸다. 지독한 투혼에서 애국심의 실체를 보았다.

해묵은 빚을 갚은 것처럼 홀가분했다. 그날 밤, 코로나19도 잊고 날았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