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소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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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영 수필가

초록빛 향기가 짙어 가는 6월의 어느 날이었다.

해안도로를 달리면서 라디오 96.3을 켜니, 한 피아니스트의 라이브 연주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4번인 월광곡의 선율이 흘러나왔다.

고교 시절 이 곡을 연습할 때 감미로워서 좋았다던 큰딸이 생각나서 나무 그늘에 차를 멈추고 문자를 띄웠다.

엄마 생일날에 월광곡 연주해 줄래?”

대학 입시 때문에 2악장 연습하다 그만뒀잖아, 1악장만 연주할게요. 세희() 대학 보낸 후 다시 연습할 거야.”

서울에서 바쁜 의사 생활을 하면서도 아직 포기하지 않은 피아노를 향한 열정이 내 가슴속으로 전해 오면서, 아이들이 피아노를 칠 때면 흐뭇하게 바라보던 남편의 얼굴이 잔잔하게 밀려오는 파도처럼 스며들어, 한동안 아쉬움과 설렘에 젖어있었다.

큰딸이 유치원에 다닐 때 집 근처에 피아노 학원이 생겼다.

어린 딸은 다행히도 잘 다녔다. 3년 후에는 작은딸도 따라다녔다.

학원에서 발표회가 있을 때마다 어머니는 외손녀의 재롱을 보려고 꼭 참석하셨다.

큰딸이 중학생이 된 어느 날 퇴근해서 집에 들어서는데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남편이 나 몰래 주문한 것이었다.

아이들은 좋아라 틈만 나면 피아노에 매달렸다.

남편은 대학 시절 파고다 공원에서 친구들과 함께 불렀다던 장일남의 비목을 딸의 반주로 부르면서 학창 시절의 추억에 잠기기도 했다.

큰딸은 아빠 생일날에 선물할 쇼팽의 즉흥환상곡, 작은딸은 학예회 때 독주할 모차르트의 터키행진곡을 연습하는 모습을 보면서, 햇병아리 교사 시절 교실의 후면에 르노아르의 그림 피아노 치는 소녀를 걸어 놓고 피아노를 향했던 꿈의 공간에서 나를 만난 것 같았다.

큰딸이 중2 전국학생 피아노경연대회에 출연했다.

이화여대 강당에서 모차르트 소나타 A장조 k.331'을 연주하여 큰 상을 받고 내려와 보니 어머니는 벌써 집에 오셔서 기다리고 있었다.

, 잘했다. 할머니가 오스트리아에 유학 보내주마.”라고 하시며 안아주었다.

일제강점기 시대에 바이올린을 잘 켜던 삼촌뻘인 친척이 동경에 유학을 갔다가 음악가 집안의 사위가 되었다.

그의 아들 피아니스트 이청 교수가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오스트리아 그라츠 국립음대에 교수로 재직 중일 때였다.

딸은 한때 큰 꿈을 갖고 열심히 피아노를 쳤으나 고3이 되자 진로를 바꿨으며, 의과 대학생이 된 후에는 피아노를 칠 시간적 여유가 없어 아쉬워했었다.

큰딸의 결혼식에 대학생인 막내는 사랑의 서약을 불렀고, 세월이 흘러 막내의 결혼식에 사위는 사랑으로라는 곡을 색소폰으로 연주했다.

삶에 위로가 되었던 가슴 뭉클한 순간들이었다.

남편의 기일에 아이들이 다 모였다.

아빠와의 즐거웠던 추억 얘기로 화기애애,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엄마 생일날 부산 작은누나네 집에서 보자.”

막내가 아예 못을 박아 놓고 갔다. 아이들이 스스로 택한 길을 성실하게 헤쳐 나가고 있어 마음 놓인다.

애들을 오랜만에 볼 때면 내가 먼저 팔 벌려 안아주곤 했었는데, 언제부터인지 내가 애들 품에 안겨져 있었다.

포근했다. 내 인생의 따뜻한 햇볕이기를 바라는 마음, 이게 늙음인가 보다.

이번 내 생일날에는 오랜만에 딸의 피아노 연주를 들을 수 있으리라 기대를 하며 하늘을 향해 한마디 툭 올렸다.

잘 계시죠? 내 생일날 달빛 소나타들어보세요.”

그리움은 구름 너머로 멀리 날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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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건너 2021-08-29 18:07:27
아름다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