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신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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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이환 수필가

인근의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어선 서너 척이 들락거리는 조그마한 포구에, 돌담으로 둘러쳐진 조그마한 초가집이 하나 있었다. 태풍이라도 불면 영락없이 날려가 버릴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집이다. 외로운 한 사내가 돌담 위에 앉아있다. 휘몰아치는 파도가 그를 삼킬 것 같다. 사내는 그게 일상적이라는 듯 개의치 않고 금방이라도 파도에 휩쓸릴 것 같은 작은 배 한 척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지평선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파도에 팔랑거리는 돛단배와 대비되면서 늘 처량하였다.

그 지역 나름대로 특색이 있지만, 신촌리 바닷가는 격정적으로 매우 아름답다. 빌레가 바다 쪽으로 시원스럽게 뻗어있는가 하면, 원담과 포구, 용머리 위로 패대기치는 파도의 모습은 한 폭의 동양화다. 이와 같은 구조는 해초류와 생물들에게 좋은 서식처를 만들어주면서, 아이들에게 바릇잡이와 물놀이터가 되어주는 소중한 곳이 된다.

살던 집이 바닷가 근처가 아니던가. 썰물 때 물이 빠져나가면, 넓은 들녘에 듬성듬성 물웅덩이가 생긴다. 그 속에 들어가 돌이라도 한두 개 들어 올리면 보말, 오분자기, 소라 등 먹을거리들이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제주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신촌리는 바닷가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전형적인 농어촌이다. 삼양동과의 경계선인 원당봉으로부터 시작되며, 곧이어 이어진 '진드르'가 일제 강점기 비행장 후보에 올릴 만큼 넓고도 길게 쭉 뻗어있다. 그 길을 볼 때마다 나는 늘 어머니를 떠올리곤 한다. 어머니와 둘이서 수확한 농작물을 등짐으로 지고 날랐던 고달픈 길이였다. 자동차로 달리다 보면 마을주민들이 길가 곳곳에 움막을 치고 수박, 참외 등을 팔던 모습이 정겹다. 최근 이들 움막이 사라지고, 주변에 건물들이 하나, 둘 들어서면서 옛 정취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신촌리에 들어서면 바로 초등학교 담장이 끝날쯤 해서 마을로 들어서는 길이 하나 있다. 그 길로 들어서면 아이들이 빌레 위에 선을 그어 땅따먹기하던 신적빌레가 유별나다. 길 따라 가다보면 구멍가게 서너 개가 있다. 명색이 상두거리다. 곧이어 시원한 남태평양의 바다가 나타난다. 바닷가 직전, 조그마한 빌레 동산. 내 유년 시절 삶의 주요 무대였던 분동산이다.

분동산 바로 아래 바다와 인접한 작은 초가집. 매서운 북풍에 휘몰아치는 푸른 파도 소리. 이에 질세라 현란하게 불어 재끼는 문풍지의 협연은 훌륭한 오케스트라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는 이런 훌륭한 연주를 감상할 여유를 갖지 못했다. 오로지 집이 휩쓸려 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이 나의 좁은 가슴을 후벼파곤 했었다.

당시 상두거리를 중심으로 서쪽 지역을 서카름, 동쪽 지역을 동카름 이라 불렀다. 동, 서카름 사이 끝자락에 왜적의 침입을 막았던 흔적일까. 굵은 돌담으로 둘러쳐진 선착장이 있는데, 이른 아침에는 생선을 사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곤 했었다. 안에서는 시원한 용천수가 쉴 새 없이 바다 쪽으로 흘러내렸는데, 이곳이 그 유명한 큰물이다. 남성들이 사용하는 큰물을 중심으로 여인네들이 빨래하거나‘몸곰는’여성용 용천수가 동서쪽에 각각 한 개씩 있는데, 짓궂은 남자아이들이 여자애들의‘몸곰는’장면을 훔쳐보기 위해 꼼수를 부리다가 혼나게 당하는 모습도 심심찮게 있던 일이었다.

당모루. 지평선이 내려다보이는, 바닷가 언덕 베기에 신방들이 신주를 모셔놓은 곳이다. 이 주변에는 바람에 순응하려는 듯 크지 못한 나무들이 꽤 있다. 이들 나무는 저마다 기기묘묘한 형상을 만들고 있는데, 인고의 긴긴 세월을 자연에 맞서 싸워 이겨낸 ‘마을의 혼’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나는 가끔 이곳을 찾아 먼 지평선 너머 있을 육지를 바라보며, 외로운 사내처럼 나만의 꿈을 그려보기도 했었다.

당모루 근처에 올레꾼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다는 카페가 있다고 해서 가본 적이 있다. 동네 개구쟁이들과 함께 개구리, 잠자리 등을 잡던 곳. 소, 말들이 물을 먹고 질펀하게 뒹굴던 ‘남생이 못’이다. 이제 잘 단장된 ‘남생이못’을 보면서 옛 추억에 빠져들기도 했었다.

당모루에서 바닷가를 따라 삼양 쪽으로 가다 보면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룬다. 그 아래 바닷가에는 심연이 깊어 수산물이 풍부했으며, 특히 다금바리 등 고급 어종 이 많았다. 여름철에는 동네 젊은이들에게 이곳은 좋은 놀이터였다. 장작과 솥 등만 있으면 나머지는 현지조달이다. 작살을 들고 물에 들어갔다 나오면 먹을거리들이 한 그물 가득했으니….

연자모루, 이멩이모루. 이들 역시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슬픈 추억을 만들어준다. 네 남매를 홀로 키우는 어머니는 숲이 우거진 깊은 고지高地에 들어가서 등짐으로 나무를 해 제주시에 가서 팔기도 했는데, 나무를 하러 가면서 내게 하는 말이 있었다.

“애야, 한 두 시쯤 되면 이멩이모루에 와 있으렴”

같은 섬. 지척에 살면서도 고향과 타향이 갈린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어디든 정이 들면 고향이라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향수는 더욱 짙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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