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 초대 제주 검사장·법과 교수...근현대 사법 기틀 닦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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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홍기, 일제강점기 중등 교육·제주대 도립·국립 승격에도 헌신
 오경로, 조부 오점·부친 오태직에 이어 3대째 명문·명필로 명성
 오기남, 유림의 수반으로 일제가 폐설한 정의향교 유지에 힘써
 오남학, 日서 항일 운동하다 징역 선고...1995년 건국포장 수훈
양홍기는 1952년 3월 15일 제주초급대학(지금의 제주대학교)이 설립되자 제1호 교수로 발령나 7년 3개월간 재임했다. 사진은 1954년 3월 찍은 제주초급대학 법과 제1회 졸업 기념 사진으로 맨 앞 왼쪽에서 4번째가 양홍기다.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양홍기는 1952년 3월 15일 제주초급대학(지금의 제주대학교)이 설립되자 제1호 교수로 발령나 7년 3개월간 재임했다. 사진은 1954년 3월 찍은 제주초급대학 법과 제1회 졸업 기념 사진으로 맨 앞 왼쪽에서 4번째가 양홍기다.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양홍기梁洪基:1894(고종31)~1974, 판사, 변호사, 초대 제주지방검찰청 검사장, 호 현오玄悟, 본관 제주, 1916년에 경성전수학교(서울법대 전신) 졸업.

제주시 화북동(별도)에서 철도원 주사 양병찬(梁炳璨) 어머니 신씨(愼氏)이다. 1921년 판검사 특별임용시험에 합격했고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원 판사로 있었다. 1924년 귀향해 동년 5월 변호사로 종사하면서 제주불교의 독실한 신자로서 활동했다.

1924년 11월 17일 오후 7시에 제주보통학교(현 제북교)에서 제주불교협회가 조직됐는데 회장에 이회명(李晦明) 스님, 부회장 김태민(金泰玟·의사), 총무 양홍기(梁洪基)가 뽑혔다.

1926년 화북사립학교(4년제)가 설립인가를 받고 동년 7월 15일 개교할 때 양홍기는 설립자 강기업(康基業)과 교장 강원진(康源珍)을 도와 학교 기반을 다지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현오는 제주중등학술강습회를 구성해 이를 모체로 제주중학강습원을 교동(校洞)의 명신(明新)학교 터전에 개설했다. 이어 1935년 12월 2일 남학생 70명과 교직원 6명으로 개원, 원장은 양홍기가 겸임했다.

초등학교만을 나온 소녀들에게 중등교육의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 1936년 3월 26일 불교포교당의 일부 시설을 이용해 신입생 46명과 교직원 8명으로 제주여자강습원을 개설했다.

1937년 9월에 실시한 도회의원 보궐선거에 입후보해 당선됐다. 1945년 제주지방검찰청 검사장으로 근무하다가 1946년 다시 변호사로 돌아갔으나, 1948년 7월 8일 다시 제주지방검찰청 검사장으로 임명됐다.

한편 1946년 그는 김홍석(金洪錫), 최계순(崔季淳), 박종실(朴宗實), 김충희(金忠熙), 홍순녕(洪淳寧) 등 제주의 유지들과 함께 제주도제(道制)실시추진위원회(위원장 김홍석)에 참가, 제94호로 제주도(濟州道 설치)를 발표하고 동 8월 1일에 도제가 실시됐다.

한편 도지사 최승만(崔承萬)의 노력으로 1952년 3월 15일 도립 제주초급대학이 백낙준 문교부장관에 의해 인가됐다. 동년 6월 1일 그는 교수 제1호로 발령나 7년 3개월 재임했다.

1953년 7월에 비로소 제주초급대학 후원회가 설립됐는데 초대 후원회장은 이윤희(李允熙), 부회장 양홍기와 김범준(金範峻), 상무이사에 조순하(趙淳夏) 교수가 맡았다.

1954년 6월에 제주시 용담동 소재 제주피혁주식회사의 공장건물 422평과 부지 1364평을 매수하고 이 주변의 토지를 확보, 학교부지를 확장했다.

이에 앞서 재단법인 제주대학후원회도 1953년 8월 10일 도지사 관사에서 이사회를 소집 이사장 최승만, 이사 길성운(吉聖運), 김익중(金益重), 양홍기(梁洪基), 고인도(高仁道), 부항석(夫恒錫), 김석호(金錫祜), 김종현(金宗鉉) 등이 모여 국립 승격 운동을 적극 추진하기로 하고 ‘제주대학 유지비 염출의 건’을 결의했다.

그 후 4년제 도립대학 승격을 먼저할 것으로 의견이 모아져 1955년 4월 6일 도립 제주대학(4년제)으로 승격됐다.

오경로의 과거 시험 답안지.
오경로의 과거 시험 답안지.

▲오경로吳卿魯:1837(헌종3)~1901(광무5), 문사, 서예가, 조부 오점(吳霑), 본관은 화순, 자는 차공(次公).

‘제주-성안’에서 태어나 연동(닛-골)에서 살았다. 선친 오태직(吳泰稷)과 같이 3대에 걸쳐 시문에 능했다. 어려서 돈독히 정훈(庭訓)을 받아 아버지 소림(小林)의 시풍과 할아버지 청파(靑坡)의 필법(筆法)을 배워 글씨도 잘 써서 이름을 떨쳤다. 승보시(陞補試)에도 뽑혔다.

3대가 영광을 입는 일은 매우 드문 경우이며 과지(科紙)까지 온전히 보관되고 있다.

할아버지 오점(吳霑)은 문명을 떨쳤고, 그의 아버지 소림(小林) 오태직(吳泰稷)도 사마시에 급제해 문명이 있고 손자 연와(蓮窩) 오경로(吳卿魯)도 시문에 능했다.

‘제주-성안’에 사는 오원희(吳元熙)가 보존해 온 시월실솔입상하(十月蟋蟀入我床下)는 오경로吳卿魯의 과거科擧 답안지이다. ‘시월 귀뚜라미가 책상 밑에서 운다.’라는 제목 밑에 18구句의 시가 쓰여져 있다.

▲오기남吳箕南:1849(헌종15)~1930(일제강점기), 향교 직원(直員·현 전교). 유림의 반수(班首). 자 영여(榮汝). 호 송설(松雪) 혹은 귤헌(橘軒), 본관 군위.

서귀포시 상효리(웃-쉐돈) 오계묵(吳啓)의 아들이다. 행의(行誼)가 있던 오지겸(吳志謙)이 증손이기도 하다.

경사자집(經史子集)에 두루 통달했으며 정의향교의 직원을 역임한 유림의 수반(首班)이다. 1909년(융희3) 7월 정의공립보통학교의 제1기 수석 학무위원으로 위촉됐다.

이들은 오기남, 조달팽(趙達彭), 현한휴(玄漢休), 강봉휴(康鳳休), 강승봉(康丞鳳), 강석항(康錫恒), 양주호(梁柱澔) 등이다. 통칭 ‘상효 오직원’이라고 불렀다.

1919년 고종 황제가 돌아가자 통곡하고 일제에 의해 폐설된 정의향교를 유지하는 데 힘썼다. 1929년 민립대학 기성회 제주지방부의 집행위원으로 활약했다.

▲오남학吳南鶴:1921(일제강점기)~1992, 일본에서 항일 활동, 1972년 오자문(吳自文)으로 개명. 본관 군위, 오병생(吳丙生)의 장남.

남원읍 한남리(부등-궤)에서 태어났다. 1945년 1월 유언비어 유포죄로 1945년 3월 16일 광주지법 제주지청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동년 8월 15일 출옥, 1992년 4월 23일 오사카 동성구(東成區) 자택에서 타계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5년 광복절에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동월 17일 남원면 한남리 오봉희(吳奉禧) 집에서 말한 요지는 “1944년 12월 3일 도쿄에 미군기 70기가 내습하여 기차를 공습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 또 나고야(名古屋)에 출장하였을 때 공습 상황을 목격하였으며 미츠비시<三菱>공업회사는 형체 없이 전부 파괴되었다”는 내용 등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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