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풍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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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언, 시인·수필가

여름의 열기를 밀치며 소슬바람이 불어온다. 고요를 헤집는 풀벌레 울음이 가슴으로 스민다. 아득한 줄 알았는데 여지없이 가을이 다가왔다. 결실의 계절이란 말에 세뇌된 걸까, 벙그는 기분이라니.

육체의 계절은 겨울 초입 같다. 여기저기 부실한 몸뚱이가 때론 야속하지만 아직 웃을 수 있는 여유는 잃지 않는다. 찾으면 길이 보인다는데, 아침저녁 잠시 동네를 걷는다. 애견을 산책시키는 청년을 만나기도 하고 보행 보조기를 밀며 걷는 할머니를 만나기도 한다. 가끔은 치매 탓으로 길가의 모래알을 쓸어 담는 할머니와 맞닥뜨리면 어쩔 수 없이 눈길이 빗겨 간다.

감귤밭 옆을 지난다. 아직 청귤이지만 가지마다 올망졸망 달렸다. 세월이 좀 더 흐르면 단맛을 품고 노란 얼굴을 내밀 것이다. 고추밭에 눈길이 간다. 강풍에 고춧대가 넘어지지 않도록 이랑마다 쇠막대를 세 줄로 박고 비닐 끈으로 얼기설기 4단을 만든 주인의 정성이 놀랍다. 땀의 의미를 실천하는 사람은 존경스럽다. 빨갛게 익어가는 고추가 농부의 일품을 보상하면 좋겠다.

얼마를 지나다 보면 묵정밭으로 변한 비닐하우스를 보게 된다. 어림잡아 2000 평은 족히 될 만하다. 키위를 재배하던 곳인데 몇 년 전에 키위나무가 베이더니 그대로 방치된 상태다. 온갖 잡풀 천국이다. 그중에서도 강아지풀이 천하를 지배한다. 처음 시설을 갖출 땐 꿈이 푸르렀을 텐데 무슨 사연으로 폐허의 슬픔을 드러내는지 가슴 아리다.

주전부리를 위해 마당에 심은 감나무를 볼 때면, 농사는 자연이 짓는다는 말이 실감 난다. 해거리로 지난해 몇 개만 달렸던 대봉감 나무가 올해는 꽤 많이 열렸다. 나날이 커가는 모습이 기대를 부풀렸다. 안타깝게도, 비 올 때면 하나둘 떨구더니 요즘 장마에도 툭툭 팽개친다. 아기 주먹만큼 키워놓고서 이별이라니 그 속내를 알 수가 없다, 하기야 농약도 안 치고 거름도 안 준 태평농법을 무척 나무라고 싶었을 테다.

같은 날씨를 겪으면서도 무화과나무는 낙과 없이 많은 열매를 제공한다. 맛도 좋아 가족들의 입맛을 돋운다. 그러고 보니 생명체는 각자 개성이 뚜렷하다. 정체성을 살리면서 다양성을 배양하는 토대다. 사람도 누구를 본보기로 삼을 수는 있지만 똑같은 사람은 될 수 없다. 결국 자기 삶은 자신이 빚는 것, 다른 사람을 너무 의식할 필요가 없음이다.

요즘 나의 정신 건강은 좋은 편이다. 아내의 말처럼 근심 걱정이 없는 태평한 사람이다. 등을 붙이면 잠이 든다. 돌아보니 근심 걱정이 문제를 해결한 경우는 드물었다. 그저 시간이 지나니 해결되는 게 인생사였다. 마음이 넓어져 누군가의 불면으로 나는 숙면을 한다는 생각에도 이른다. 인간은 귀중하다. 각자도생의 정글사회라고 하지만, 한발 물러서 생각하면 모두 소중한 인연인 것을.

며칠 전 아내와 저녁을 먹으러 가까운 음식점을 찾았다. 이전에 들렀을 때는 손님들로 북적였는데 너무 한산하다. 이유를 물었더니 코로나 방역지침으로 18시 이후엔 2명씩만 받는 탓이라 한다. 4명까지 오던 때와는 현격한 차이가 난다. 자영업자의 고통을 어찌 위로할까.

지난달 코로나 백신을 2차 접종했다. 접종률이 높아져 좀 더 밝은 사회로 거듭나길 소망해 본다. 어려운 시절 김종삼 시인의 시구를 널리 공유하고 싶다.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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