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연인의 흔적을 따라...상처 치유하는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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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가을로
건물 붕괴로 약혼자 잃은 현우
10년 후 연인의 다이어리 받아
다이어리 속 계획대로 여행길
동선 계속 겹치는 세진과 만나
삼풍백화점 붕괴로 약혼자 민주를 잃고 힘겹게 살아가는 현우에게 민주의 신혼여행 계획이 담긴 다이어리가 도착한다. 현우는 민주의 다이어리 속 여정을 따라 혼자 떠나는데 그곳에서 가는 곳마다 마주치는 세진이라는 여성과 동행하게 된다.
삼풍백화점 붕괴로 약혼자 민주를 잃고 힘겹게 살아가는 현우에게 민주의 신혼여행 계획이 담긴 다이어리가 도착한다. 현우는 민주의 다이어리 속 여정을 따라 혼자 떠나는데 그곳에서 가는 곳마다 마주치는 세진이라는 여성과 동행하게 된다.

‘Guilt is perhaps the most painful companion of death.(죄책감은 아마도 죽음의 가장 고통스러운 동반자일 것이다.) -가브리엘 코코 샤넬’

1995년 6월 29일 오후 6시 직전, 방송사 여행 다큐 제작 피디(PD)인 민주는 서울 강남구 서초동 삼풍백화점에 있었다. 신혼가구를 알아보기 위해 지하 커피숍에서 약혼자 현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신혼여행 계획을 정성들여 짜 놓은 다이어리를 현우에게 선물하려고 막 포장을 마친 순간 ‘우지끈~ 쾅!’ 하는 굉음이 울렸다. 주변 모두가 화들짝 놀라고 몇 초 후 세상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천정이 내려앉고 바닥이 쪼개지면서 정신을 잃었다.

막 퇴근한 초임 검사 현우는 약혼녀 민주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현우 직장인 검찰청 앞에서 기다리겠다는 그녀를 억지로 등 떠밀어 인근 삼풍백화점 커피숍에 가서 기다리게 했었다. 백화점 앞 길 건너에서 신호 대기 받던 중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민주가 있을 그 백화점 건물이 눈앞에서 무너져 내린 것이다. 꿈속에 서있는 느낌. 이후 그의 삶의 모든 건 바뀌었다.

유지태-김지수 주연의 영화 ‘가을로’는 삼풍백화점 사고로 연인을 잃은 한 남자의 고통과 치유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건이 있고 10년 뒤 여전히 민주를 못 잊고 힘겹게 살아가던 중견 검사 현우 앞으로 낯익은 다이어리 한 권이 배달된다. ‘민주와 현우의 신혼여행’이란 제목이다. 민주가 짜놓은 일주일간의 국내여행 계획이 아기자기하게 정리된 다이어리였다. 민주의 것임은 맞지만 어떤 경로로 자신에게 오게 됐는지는 모른 채 현우는 일주일 휴가를 내고 무작정 떠난다. 민주가 짜놓은 다이어리 속 여정 그대로 현우 혼자 10년 늦은 신혼여행 길에 오르는 것이다.

첫 번째 여행지는 흑산도 인근의 작은 섬 우이도, 화면이 열리며 모짜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선율과 함께 민주의 내레이션이 이어진다. ‘바다를 향해서 이 여행은 시작되는 거야. 바다 가운데에 사막을 가진 섬이 하나 있어. 모래 서 말을 먹어야 시집간다는 말이 있을 만큼 모래가 많고, 그 모래를 싣고 바다를 건너온 바람이 가득한 곳이 이 우이도야.’ 한반도 서해안과 남해안을 동시에 아우르는 섬 여행을 시작으로 영화는, 7번 국도를 따라 아름다운 동해안을 거치며 강원도 태백, 정선, 영월까지 우리 땅 좋은 여행지 십여 군데를 관객 앞에 펼쳐놓는다.

두 번째 여행지는 담양의 ‘맑고 깨끗하다’는 이름을 뜻하는 정원 소쇄원(瀟灑園)이다. ‘바람소릴 들으며 다리를 건너면 맑은 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정원이 나와. 자연을 편리한대로 뜯어고친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연에 다리며 집들을 가만히 올려놨어. 자연과 인간이 서로 존중하고 교감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애.’ 민주가 오래 전 물가에 내려놓은 단풍잎 한 장이 개울물을 흐르고 오랜 세월을 흘러 현우의 손에 와 닿는 곳이다.

영화 ‘가을로’ 포스터.
영화 ‘가을로’ 포스터.

세 번째 여행지인 포항 내연산 큰 바위 아래는 둘이 함께 등산 중에 비를 피해 앉았다가 첫 키스를 나눴던 추억의 장소다. ‘잘 들어봐. 빗소리 좋지? 하늘 위에서 들으면 비는 아무 소리도 없이 내릴 거야. 우리가 듣는 빗소리라는 건 비가 땅에 부딪히고 돌에 부딪히고 집 지붕에 부딪히고 우산에 부딪히면서 내는 소리잖아. 그래서 우린 비가 와야지만 우리 주위에서 잠자고 있던 사물들의 소릴 들을 수 있는 거야.’

내연산 열두 폭포 중 가장 큰 연산폭포와 구름다리도 화면 가득 아름답게 펼쳐진다. 동해안 7번 국도를 따라 들른 평해의 월송정은 울창한 소나무 숲을 사이에 두고 동해바다와 마주한다. ‘만 그루의 소나무가 십 리가 넘는 흰 모래와 어울려 절경’이라는 안내문이 있는 정자다. 관동팔경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한 이곳에서 동해의 일출을 바라보던 현우는 세진이라는 이름의 한 여성과 마주친다. 죽은 민주와 연관이 있는 여성이지만 아직은 그런 인연을 서로 알 수가 없다. 서로 동선이 같은 걸 알게 된 둘은 잠깐 동안 현우 차로 함께 이동한다.

‘동해바다랑 소나무 숲이 있어서 7번 국도가 아름답다고 들었지만요. 저런 어촌마을이 있고 그 안에 저렇게 사람 사는 모습들이 있어서 이 길이 더 좋은 거 같아요. 그래서 그런지 이 길을 가다 만나는 마을들은 꼭 그 이름을 한 번씩 불러줘야 될 것 같아요. 안 그러면 서운해 할 거 같아서…. 병곡, 후포, 평해, 월송, 덕산.’

동해안 7번 국도를 달리며 운전석 옆에서 혼자 읊조리는 세진의 이 말들은 다이어리에 실려 있는 민주의 글 그대로이다. 세진은 민주가 죽어가며 건네준 다이어리를 10년 동안 갖고 있다가 현우에게 보내준 여성인 것이다. 그러나 영화 결말에 밝혀지는 사실이라 아직은 세진도 이 남자가 민주의 약혼자임은 상상도 할 수 없다.

담양 메타세콰이어길을 찾은 민주.
담양 메타세콰이어길을 찾은 민주.

해가 서쪽으로 질 때면 산 위의 부처님 바위가 연못에 비친다는 울진의 불영사(佛影寺)는 다섯 번째 여행지였고, 3년간 자연휴식년 중이라 입구는 막혔으나 소광리 금강 소나무 숲도 여섯 번째 여행지로 잠깐 등장한다. 태백선과 정선선 기차가 갈라서는 증산역, 정선 구절리 아우라지역, 민주가 가장 좋아했던 오대산 전나무 숲길과 인근 월정사, 이렇게 이어지는 강원도의 수려한 여행지들을 거치며 비로소 영화 속 세 남녀의 아픈 인연의 고리가 또렷이 밝혀져 간다. 영월로 이어지는 막바지 여행길, 아름다운 선율 ‘성모의 보석 간주곡’이 흐르며 동강 어라연(魚羅淵)이 화면 가득 펼쳐진다. 현우가 등을 보이며 바라보는 서강 선돌의 경관이 한 폭의 그림처럼 그윽하다.

‘새로 포장한 길인가 봐요. 예쁘죠? 전에 있었던 길들의 추억이 다 이 밑에 있을 텐데……. 사람들은 이제 그 추억을 안고 이 새 길을 달리겠죠? 좋은 길이 되었으면 좋겠다.’ 엔딩 장면인 담양 메타세콰이어길에서의 민주의 마지막 내레이션은 하늘나라의 민주가 현우와 세진을 내려다보며 해주는 당부의 말일 것이다. ‘얘들아, 이제 그만 나를 잊어버리고 새 삶을 살아줘’라는…….

첫 여행지인 우이도 모래사막에서 현우에게 들려주는 민주의 목소리. ‘사막에서부터 여행을 시작하는 게 이상하다구? 그럼 이런 주문을 한 번 외워 보는 건 어떨까? '지금 우리 마음은 사막처럼 황량하다. 하지만 이 여행이 끝날 때쯤이면 우리 마음속에 나무숲이 가득할 것이다.’‘

마음속이 사막처럼 황량하다고 느껴진다면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보자. 거창한 준비 없이 가볍게 떠나면 어떤가. 현우와 민주의 신혼여행 코스도 좋고, 가까운 주변이면서 익숙하지 않은 곳도 좋겠다. 일상을 벗어나 어딘가를 배회하다 길고 짧은 여행이 끝날 때쯤이면 우리 마음속에도 어느새 나무숲이 가득 들어차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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