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 해녀 투쟁 주도적 역할...야학 통해 항일의식 높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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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대진, 일제강점기 청년동맹 조직해 노동·항일 운동 전개
 오대현, 신축민란 이끌어유림들이 ‘삼의사비’ 세워 추모 
 오덕성, 조선 후기 정의현 출신 수재시 잘 지어 명성 높아
 오매춘, 사회주의 단체 신인회 출신한림 부녀동맹위원장
 오문규, 일제 규탄 격문 배포 등 독립운동 하다가 옥고 치러
오문규는 1932년 일제의 해산물 판매 부정 사건에 대응한 해녀 항쟁과 관련 검거돼 옥고를 치렀다. 사진은 1930년대 해녀들이 자맥질하기 직전에 물안경을 단단하게 고쳐 쓰는 모습.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오문규는 1932년 일제의 해산물 판매 부정 사건에 대응한 해녀 항쟁과 관련 검거돼 옥고를 치렀다. 사진은 1930년대 해녀들이 자맥질하기 직전에 물안경을 단단하게 고쳐 쓰는 모습.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오대진吳大進:1898(광무2)~1979, 제주 청년동맹과 제주 야체이카 항일 활동, 광복 후 건준(建準) 제주도당 위원장, 본관 군위, 오영식(吳榮植)의 아들.

대정읍 하모리(모실-개)에서 태어났다. 항일 동지 김한정(金漢貞)과는 외종제지간(外從弟之間)이다.

1925년 모슬포청년회 대표였던 오대진을 포함한 제주도내 8개 청년 단체들이 모여 제주청년연합회를 조직, 고은삼(高殷三), 김석호(金錫祜), 김한정(金漢貞), 강창보(姜昌輔), 한상호(韓相鎬) 등과 함께 집행위원으로 선출됐다.

실질적인 업무를 관장하는 상무위원은 신인회 소속의 사회주의 성향의 청년들이 거의 장악했다. 그러므로 1925년 이후 제주 청년운동은 사회주의 사상가들의 영향권 안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그는 1927년 2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해 제주야체이카에 소속됐다. 1928년 10월 모슬포의 단추공장 노동자 100여 명의 노동쟁의, 1929년 5월 어린이날에 모슬포의 청소년들의 시위운동,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신당(神堂) 배격·예배당 설교 반대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는 오대진, 이신호가 청년동맹을 통해 벌인 항일 운동의 일환으로 일어난 것이다.

1930년대 초반 주로 대정면 출신의 오대진, 이신호, 김한정 등 재건 야체이카 구성원들이 활발하게 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의 관할 하에 있던 안덕면의 경우 부정호세불납동맹(不正戶稅不納同盟)을 결성해 일제의 수탈에 항거함으로써, 조선 후기 이래 농민 항쟁의 맥을 지속적으로 잇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1931년 11월부터 1932년 1월까지 전개된 제주 해녀의 항일 투쟁도 지원했다.

1932년 3월 1일 대정 모슬포에서는 기미 독립선언 기념일에 다수 군중이 시위운동을 전개, 그 배후 인물이라고 해서 이신호(李辛祜)와 함께 체포됐다. 1933년 2월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징역 6년형을 선고하자 항소, 1933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다.

▲오대현吳大鉉:1875(고종12)~1901(광무5), 한말의 선비, 신축민란의 수창자(首唱者), 대정상무사(商武社) 부회장, 일명 오을길(吳乙吉), 본관은 군위.

중문면 예래리(열리) 태생이다. 후일 향장 좌수(座首)가 됐다. 대정 유림의 좌수로서 채구석(蔡龜錫), 송희수(宋希洙) 등과 함께 상무사를 결성할 때 부회장으로 추대됐다.

1901년 3월에 그는 강우백(姜遇伯), 이재수(李在守) 등과 더불어 천주교의 교세가 확장됨에 따라 교폐(敎弊)가 심하고 또 봉세관 강봉헌(姜鳳憲)에 의해 세폐(稅弊)가 심해지자 이에 상무사 회원들은 반천주교(反天主敎)운동을 전개, 주성(州城)을 공략하기 위해 오대현은 제1차 봉기 때에는 서진장두(西陣狀頭)가 되고, 2차 봉기 시는 동진장(東陣將)이 됐다. 그는 살상을 가려서 했으며 과격하지 않았다.

이 민란으로 천주교 신도들이 수백 명이나 살해되자 조정에서는 찰리사 황기연(黃耆淵)을 제주로 파견, 이를 진압하게 했다.

동년 7월 17일에 민란의 우두머리 오대현, 강우백, 이재수 등 3명과 세폐를 일으킨 봉세관(捧稅官) 강봉헌, 그리고 행정 책임자인 대정군수 채구석, 또 민란 관련자 40여 명을 체포했다. 이들을 해상으로 인천을 거쳐 서울로 압송해 갔다.

이 민란이 60회갑 되는 1961년 8월에 대정군의 유림 및 유지들이 대정삼의사비(三義士碑)를 대정골에 세웠다.

▲오덕성吳德成:1754(영조13)~1813(순조13), 문인, 초명은 덕함(德咸), 자는 행민(行敏).

아버지 오정기(吳廷虁), 어머니 제주양씨의 둘째 아들로 정의현 좌면(성산면) 난산리(난-미)에서 태어났다. 공부할 때부터 형인 덕겸(德謙)과 같이 형제가 총명하다는 칭찬을 들었다.

성안에서 귀양살이하는 선생에게 도학을 닦았다. 유고가 있었으나 1948년 4·3 사건 때 일실(逸失)됐고 시 몇 편이 구전되고 있다.

형은 문장을, 동생은 시를 잘 짓는다는 명성이 드러났다. 1794년에 심락수(沈樂洙) 어사가 시취할 때 형은 송(頌) 차상(次上)으로, 덕성은 논(論) 삼하(三下)로 뽑혔으나 과방(科榜)에는 오르지 못해 사람들이 애석해했다.

당시에 정의현의 중요한 관청 문서는 모두 공(公)이 지었다고 전한다.

정의향교 청금유사(靑衿有司) 도훈장(都訓長)을 지냈다. 탐라빈흥각에 등재돼 있다.

▲오매춘吳梅春:1917(일제강점기)~?, 여성 정치인, 한림면 명월리 태생.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첫 단체인 신인회(新人會) 소속 소년회 출신, 8·15 광복 이후 장성해 해방된 국가 건설에 큰 몫을 하게 된다.

한림면 부녀동맹위원장 오매춘, 대정에서 여맹활동을 한 이경선(李景仙), 애월면 인민위에서 활동한 이영필(李英必), 가파도(겔파섬) 청년동맹위원장 강군섭 등은 신인회 활동으로 자란 대표적 인물들이다.

▲오문규吳文奎:1900(광무4)~?, 제주 혁우동맹과 야체이카의 항일 활동, 본관 군위.

신재홍(申才弘)이 주도하는 혁우동맹에서 사회주의 이념 아래 출발했다.

1932년 1월 12일 해녀 항쟁이 일어나자 동월 23일 1차로 세화리 문도배, 종달리 한향택, 한원택, 우도의 신재홍, 하도리 오문규 등을 먼저 검거, 그는 1933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1930년 해녀들의 당국에 대한 불만이 날로 팽만하는 가운데 해산물 판매를 둘러싼 부정사건이 성산포에서 일어났다.

성산포산(城山浦産) 우뭇가사리를 조합 측에서 경매 입찰 근당 20원으로 낙찰했음에도 불구하고 간악한 조합 서기는 상인과 결탁 근당 18원으로 내려버렸다.

이에 해녀와 주민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일본 관리들은 주민 대표 현재성(玄才性) 외 4명을 검거, 29일 간 구류 처분을 내리고 악질 관리나 상인을 두둔했다.

이후 일부 항일인사는 격문을 만들고 성산·구좌 일대에 배포해 그들의 악랄성을 규탄, 격문 살포자 오문규, 부승림(夫升琳)은 검속당하고 벌금형이 내려졌다.

해녀 투쟁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오문규 등 청년 운동가들은 야학 교육으로 항일의식을 배양했다.

오문규는 해방 후 구좌면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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