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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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초가을을 한자어로 맹추라 한다. 음력 7,8,9월을 맹추(孟秋)·중추(仲秋)·계추(季秋)라 한 데서 온 말이다. ‘맹추’란 말에 장난기가 발동한다. 철없이 구는 순진한 녀석에게 대놓고, 어깨 치며 “야, 요 맹추야.” 하는 스스럼없는 장면이 떠오른다. 반어적 표현이긴 하나 가을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연년이 초가을을 대할 때마다 아직 익숙지 못해 두리번거리는 좀 의뭉하고 어리숙한 사람 같은 느낌이 들곤 한다..

백로 이틀 전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베란다 창을 열다 깜짝 놀랐다. 북쪽 창으로 경주마처럼 달려드는 쌀쌀한 갈바람에 민소매를 놀라게 하더니. 맞은편 남쪽 창을 마저 열었더니, 그새 거실을 스쳐 지나는 바람이 빠져 나가며 집 안에 너울 같은 파장을 일으켜 놓는다. 엊그제까지의 늦더위는 온데간데없다.

지난여름 폭염의 날들에 얼마나 부대꼈나. 초가을 이 바람이 선심이라도 쓴다고 불어왔지 그냥 멋쩍게 온 게 아닌 성싶었다. 아파트 동과 동 사이로 어느새 세안했는지 눈썰미 서글서글한 한라산 정상이 좌우 능선에 근육을 세워 불끈거리고 있다. 가만 바라보자니 처졌던 몸도 함께 옴짝거린다. 몸속으로 싸고도는 바람결에 번쩍 정신이 깨어났다.

일찌감치 우리에게 가져다준 선선한 이 바람, 초가을이 갖다준 소중한 배려가 아닌가. 더위를 한 방 먹여 놓는 깐에 참 삽상하다. 농에서 아직 덧옷을 꺼내지 않아도 된다. 갈바람은 아직 날 끝을 세우지 않았고, 불긋불긋 단풍을 채색하는 큰 손도 나부대지 않는다. 단풍도 더 쌀쌀해지기를 기다리노라 계절의 계단에 앉아 있는 양, 잰걸음으로 산을 내리는 낌새가 아니다.

초가을을 바라보는 내 눈은 계절의 겉만 훑는 것일 뿐 그 안을 훑어보지 못한다. 시침 뚝 떼고 있을 뿐,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징검인데, 계절인들 그냥 무심할까. 가을걷이로 텅 빈 논과 밭을 바라보는 농부의 심사 허허로울 것인데, 거둬들이고도 채워지지 않는 궁핍에 집으로 돌아서는 걸음이 천근만근일 것이다.

농부는 차라리 계절이 초가을에 머물기를 기도하리라. 꽃다운 단풍은 떠나는 자를 위해 염(殮)하며 분 바르는 마지막 화장 같은 것. 단풍 속으로 눈앞에 점령군마냥 추운 겨울이 와 있고, 우리는 겨울 석 달 동안 춥고 고독한 속에 갇혀 있어야 한다.

나무들이 초가을에 제일 노심초사할 것이다. 단풍으로 치장해 가을이 절정을 치면, 다음은 겨울이 목전에 와 있다는 신호임을 왜 모를까. 빈 가지들이 몰아닥친 강풍에 몸을 내맡겨야 한다. 바람에 흔들리고 휘청대는 남루. 그래도 저 먼 데를 돌고 돌아 그예 봄은 올 것이다. 겨울을 견뎌내 언덕 너머 봄이 오는 길목으로 걸음걸음 나가다, 봄 처녀로 새 풀옷 입고 올 봄을 마중하러 줄달음치리라.

초가을은 왕성했던 여름을 뒤로 하고 앞을 내다봐야 하는 준비의 계절이고, 나를 되돌아보는 반성과 성찰의 계절이다. 그리고 겨울을 나기 위해 거둬들인 것을 비어 있는 곳간에 한가득 채워 놓아야 하는 저장의 계절이다. 준비하면 근심이 없고, 자신을 돌아보면 성숙하라 일깨워 주고, 채워 두면 느긋해 걱정이 없다. 말로 하지 않고, 침묵으로 혹은 기호 없는 바람으로, 서리로 일깨운다.

초가을은 계절의 초입, 겨울로 가는 가을의 들머리다. 꼿꼿하게 강단을 키워야 할, 비켜설 수 없는 길목이다. 눈앞 겨울 예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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