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쭐내다’와 ‘졌잘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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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양진 수필가

언젠가 중학생으로 보이는 아이가 ‘뻐장이 어디예요?’라고 물었을 때 ‘뻐장’이라는 그 생경한 말에 당황스러웠다.

소통은 대개 사용하는 언어를 매개로 이루어지는데, 한쪽이 아무리 친절하게 말을 한들 듣는 쪽이 그 뜻을 모른다면 그것은 외계어에 가깝다. 그 짧은 순간이 그러했다. 그게 뭐냐고 물었더니 ‘버스정류장’이란다.

어느 시대나 신조어는 탄생하고 사라진다. 인터넷의 발달은 그 흐름을 가속화시켰다. 뭐든 빠르고 간단한 게 각광 받는다. 말보다 문자가 더 편한 시대, 글자 수를 줄이는 것은 기본이고, 게임 용어나 외래어가 합성된 새로운 말들이 마구 태어나고 있는 작금이다.

TV 예능 프로를 시청하다 자막을 넣지 않았으면 내가 저 말을 이해했을까 하는 말들이 허다하다. 한 개그맨이 신조어 욕심에 아무 맥락 없이 말끝마다 줄여 말하는 게 지나치다 싶어 채널을 돌린 적이 있다. 밑도 끝도 없는 말장난에 속이 더부룩한 것처럼 불편했다.

하지만 누가 만들었는지 그 말과 상황이 찰떡처럼 어울려 무릎을 딱 치는 신조어도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집에 콕 박혀 있다는 ‘집콕’, 그 생활이 길어져 운동 부족으로 살이 쪘다는 ‘확찐자’, 외식이 줄다 보니 부모는 돌아서면 밥상을 차려야 하고 또 돌아서면 밥상을 차려야 한다는 ‘돌밥돌밥’, 마스크를 턱에 걸쳐 사용하는 ‘턱스크’, 코로나와 우울감(blue)이 합쳐진 ‘코로나 블루’ 등등. 모두 재치 있는 표현들이기는 하나 코로나 종식과 함께 어서 옛말이 되었으면 한다.

좋은 것은 곁에 오래 두고 싶듯이 요즘 신조어 중에도 그런 게 있다. ‘돈쭐내다’와 ‘졌잘싸’. 처음 접했을 때 어감이 다소 이질감 있게 다가왔지만, 그 뜻을 아니 흐뭇한 미소가 일었다.

‘돈쭐내다’는 ‘돈’과 ‘혼쭐내다’의 합성으로 빚어진 단어다. 꾸짖거나 벌로 혼쭐을 내는 것이라면 돈으로 혼내는 게 ‘돈쭐내다’이다. 아무런 대가 없이 어려운 이에게 자선을 베푼 미담이 SNS를 타고 퍼지면, 이 훈훈함에 신바람이 난 사람들이 그곳으로 우르르 몰리거나 배달 앱으로 주문한다. 그 가게에서 팔고 있는 상품을 구매하여 돈을 많이 벌게 해 주자는 것이다.

선행이 알려진 곳곳에 돈쭐냈다는 기사를 볼 때마다 사람들이 얼마나 따뜻한 이야기에 목말라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언제나 감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 점점 각박해 가는 삶 속에서 아직은 살 만하다는 작은 희망을 건지고 싶은 게다.

졌지만 잘 싸웠다는 ‘졌잘싸.’ 지난 도쿄 올림픽에서 우리가 열광한 것은 금·은·동메달이 아닌 ‘졌잘싸’였다. 졌지만 최선을 다해 싸웠던 선수들. 그 자리에 있기까지 허투루 흘린 땀이 없기에 우리들에겐 그들 또한 승자였다. 이긴 상대에게 축하를 건네고 스스로에게도 만족하는 환한 웃음이 그들을 더 돋보이게 했다.

결과를 중심으로 해석하고 평가하는 이 시대에 ‘졌잘싸’는 그 과정에 응원을 보내는 메시지가 아닐까 한다. 어떤 목표 앞에 고개 숙인 누군가에게 혹은 나에게 툭 던질 수 있는 위로의 말. ‘돈쭐내다’처럼 사람 냄새가 폴폴 난다.

싱그러움을 다퉜던 초록의 색채도 조금씩 곁을 내주며 가을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우리의 삶에도 이처럼 여유로움이 물들었으면 한다. 돈쭐낼 일이 많고 힘들어하는 이에게 졌지만 잘 싸웠다고 토닥이는, 배려가 번진 그런 빛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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