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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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수필가

의자를 창구 쪽으로 바짝 당겨 앉았다. 오른쪽 귀를 투명 가림막을 향해 들이밀고 시선은 직원의 얼굴로 향했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어 신경을 곤두세웠다. 마스크를 한 채 눈치로 대충 의중을 읽었다. 혹시 금융거래 사고인 보이스피싱을 염려한 말이었다.

한동안 안구 건조증으로 고생을 하다 이젠 귀가 어두워진 증세를 느낀다. 병원을 가야 할 것 같은데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아직은 괜찮을 거야. 스스로 주술을 걸곤 한다. 몸에서 나이 듦을 먼저 감지할 수 있는 기관이 눈과 귀인데,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내 안의 부정이다.

어찌 된 일인지 꼭 필요해 들어야 할 말은 잘 들리지 않고, 듣고 싶지 않은 말에는 작은 소리에도 콕 박혀 온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힐 것 같은 말은 대충 흘려듣고 만다. 피로감을 느끼는 말에는 부쩍 비켜 가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대화는 상대방이 이해하기 쉬워 폭넓게 공감할 수 있어야 호감이 간다.

이제는 세상의 소리에 무심하게 살 때가 됐다. 나와 관계없는 말이나, 눈에 거슬리는 일은 시선을 돌리게 된다. 나이에 걸맞은 행동으로 말을 아끼고 타인의 말에, 진지하게 경청해야 품위 있는 사람으로 존경받는다. 귀가 잘 안 들리고 눈이 침침해도, 때가 되어 당연히 찾아온 동행자로 받아들이면 편하다. 늦게 철이 드는지 세상 물정 모르고, 지난날 울컥울컥 뱉어내던 말에 후회와 자책만 남는다.

가끔 깊은 심연 속으로 침잠하는 순간이 있다. 갈댓잎 바스락거리듯 가슴이 팍팍할 때, 내 귀는 대숲에 이는 바람 소리를 청한다. 어머니 등에 업혀 잠들었던, 생가 뒤란 신우대 숲을 헤집어 뒤척이던 바람은 푸른 파도처럼 가슴에서 일렁인다. 쓰고 있는 글이 잘 풀리지 않거나 손에 잡히는 것 없어 서성이는 날, 눈을 감고 싱그러운 그 소리를 불러들인다. 이 순간은 요람 속에 누워 곤히 잠든 아기와도 같이, 가난한 내 영혼을 위로받게 한다.

강심 깊고 폭 너른 강은 침묵 속에 유장하게 흐른다.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열정과 욕망을 잠재우며, 웅숭깊은 우물처럼 진중하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소리 없는 거대한 흐름 앞에서는 말을 잃게 하는 감동이 있다. 반면 졸졸 흐르는 도랑물은 모래를 실어 나르고, 자갈도 굴리며 경쾌한 목소리를 낸다. 이런 자연의 언어가 가슴에 닿을 때, 사람들은 환호하고 감동한다.

대권 주자들이 연일 시끄럽다. 얼마 전 보궐선거를 치르며 국민에게 많은 피로감을 주었다. 나라를 어떻게 이끌어 가겠다는 거시적 정책보다, 확인되지 않은 상대방 흠집을 낱낱이 헤집어 집요하게 까발리는 말들에 진저리가 난다. 유독 우리나라는 선거가 잦다. 내년 대선을 치를 일이 걱정이다.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하지 않는, 서로 허물 들추기에 격앙된 목소리는 탁한 공해나 다름없다. 경청보다 고개를 돌리는 유권자의 심정을 모를 리 없을 텐데. 가장 듣고 싶지 않은 소리는 날을 세우고, 상대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아닐까.

말은 세상으로 연결하는 소통의 회로다. 눈으로 실체를 구분하고 소리로 그 성향을 구별한다. 말에는 품격이 있어야 하고, 표정에는 그 사람의 인품이 배어 있다. 말 한마디도 허투루 할 수 없는 이유다. 어떻게 해야 내 뜻을 전달할 수 있느냐 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상대의 마음을 끌어내는 대화의 기술이 필요한 세상이다. 거기에 핵심이 들어있으면 된다. 바로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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