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상(好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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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기 시인

꽃이 피고 지는 것처럼 사람도 태어나고 죽는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장미도 피었다 지고 이름 모를 숲속 들꽃도 소리 없이 피고 진다. 돈 많은 삼성 이건희 회장도 가고 서울역 노숙자도 슬퍼하는 이 없이 사라진다. 이 모든 게 자연의 섭리다.

아침 신문을 받으면 우선 부고(訃告)부터 살핀다. 혹시 내가 잘 아는 분이 돌아가시지는 않았나 하는 걱정이 앞서서다. 그리고 모르는 분이더라도 고인의 연세부터 살피곤 오래 사신 분이면 안도하지만 젊은 분이면 괜히 가슴이 아프다. 내 주위에 지인들이 어머니가 90이 훨씬 넘어 치매를 앓거나 몸이 쇠약해 요양원에 모신 경우가 여럿 있다. 아들도 알아보지 못한다며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면 돌아가신 부모님과 장인 장모님을 떠올리며 불효를 반성하곤 한다.

그래도 부모가 살아계시면 괴로울지언정 고아는 아니다. 부모님 가시고 나니 갑자기 버려진 고아가 된 느낌으로 얼마나 외로웠는지 모른다. 이렇게 나이 들어 자식도 몰라보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과연 호상(好喪)일까.

호상의 사전적 의미는 복을 누리며 별다른 병치레 없이 오래 산 사람의 상사를 말한다.

그러나 이 경우는 상주의 입장이 아니라 문상객의 처지에서 본 말일 것이다. 부모의 상을 만나 애통해하는 상주에게 호상이라며 마치 덕담을 하듯 한다면 큰 실례가 될 것이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한 달 아니 하루라도 더 모시지 못한 죄가 커서 가장 큰 불효이거늘 어찌 호상이라 말한단 말인가. 요즘 상갓집 풍경을 보면 좀 안타까운 경우가 많다. 조의금을 전해주고 답례품을 받는 시장(?) 같다. 진심 깃든 위로와 격려, 고인에 대한 애도는 사라져버린 것 같아 속상하다. 물론 나고 죽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긴 하나 젖 물려 키운 그 사랑을 생각한다면 최소한 상주의 슬픔만은 가득한 장례식장이어야 하지 않을까 제발 상주는 웃지 말았으면 좋겠다.

부모는 땅에 묻고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 했다.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뜨면 부모는 그 자식을 가슴에 묻고 평생 아파하고 고통스러뤄 한다. 그래서 악상(惡喪) 또는 참척(慘慽)이라 하며 주변을 모두 슬프게 한다. 그래서일까 악상은 부고를 내지 않고 조용히 아픔을 묻는다. 이에 비하면 오래 사시고 부와 명예를 누리고 돌아가시는 분이야 복이 좋은 것임에 틀림 없다.

101세 노철학자를 욕보인 장모 변호사는 그의 부모가 돌아가시면 불효를 뉘우치며 눈물을 흘릴까. 아니면 그만 살면 잘 살았다고 즐거워할까. 노철학자가 돌아가시면 그 자녀에게 호상이라고 다시 놀릴까. 신라가 망하자 삼베옷을 입고 금강산에 숨어 망국의 죄를 뉘우치며 삶을 마쳤다는 마의태자. 왜 그는 겨울에도 바람이 숭숭 드는 삼베옷을 입었을까.

왜 상복이 삼베옷일까. 그 의미를 생각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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