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희생자의 다른 목숨 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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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동철 사회부장

‘해안에서 5㎞ 이상 떨어진 중산간마을을 통행하는 자는 이유 불문하고 총살한다.’

1948년 10월 17일 군이 주도한 ‘초토화작전’은 양민 학살의 전주곡이었다. 1949년 3월까지 5개월 동안 양민 집단 살상이 자행됐다. 4·3발생부터 1948년 9월 말까지 희생자는 1000명이 안 됐지만 초토화작전 이후 2만5000명이 넘는 양민이 학살됐다.

무장대를 고립시킨다는 이유로 중산간마을 100여 곳이 잿더미가 되면서 강제 추방된 주민들은 해안마을로 이주했다. 가을걷이 곡식과 가축이 전 재산인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쉽게 떠나지 못했다.

이들은 동굴과 곶자왈에서 숨어 지냈다가 희생됐다. 해안마을로 내려왔지만 가족 중 한 명이라도 사라지면 ‘도피자 가족’으로 낙인찍혀 대신 죽임을 당하는 ‘대살(代殺)이 성행했다.

전과를 올리기 위한 ‘함정 토벌’도 있었다. 1949년 1월 3일 아침, 인공기와 총을 든 한 무리가 제주시 도평리에 들이닥친 후 주민들에게 ‘동무, 동무’라고 부르며 악수를 청했다. 무장대로 위장한 군·경 토벌대는 주민 78명을 외도리의 밭으로 끌고 간 후 총살했다.

1948년 12월 조천면 자수 사건의 경우 토벌대의 말을 믿고 청년들이 군 주둔지인 함덕초등학교로 찾아갔지만 이들은 제주시 아라동 ‘박성내’(제주여고 인근 하천)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토벌대는 시신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지르면서 96명이 한날한시에 희생됐다.

1949년 1월 16일 제주시 애월읍 빌레못굴에 숨은 주민 30여 명 중 25명이 토벌대에 총살당했다. 토벌대는 3살 난 어린 아이를 바위에 패대기쳐 학살했다. 이처럼 제주4·3의 학살현장은 생지옥이나 다름없었다.

70년이 흐른 지금, 정부는 제주4·3특별법 개정에 따른 후속 조치로 희생자 1만4533명에게 피해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그런데 보상금 차등 지급안을 검토하면서 도민사회로부터 분노를 샀다.

행정안전부가 검토했던 차등 지급안은 교통사고 사망자에게 적용하는 일명 ‘호프만식 계산법’이다. 사고로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경우를 가정해 정년까지 받을 월급이나 소득을 기준으로 보상금을 지급하는 산정법이다. 호프만식 계산법은 빈부와 신분에 따라 죽음 값, 즉 목숨 값이 달라서 인간의 생명에 값어치를 매길 수 있느냐는 논란이 있었다.

행안부는 4·3 당시 희생자의 나이와 직업, 소득에 따라 피해 보상금을 차별적으로 지급하려고 했다가 최근 이 방침을 철회한다고 했지만 공식 입장은 내놓지 않았다.

이번엔 법무부가 발목을 걸었다. 1948~1949년 군사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희생자 2530명의 명예회복(전과기록 삭제)에 대해 일괄 재심이 아닌 선별 재심을 검토해서다.

공소장이나 판결문도 없이 전국 각지의 교도소에 수감된 2530명은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대다수가 행방불명됐다.

다행히 1999년 국가기록원에서 이름·나이·직업·본적지, 언도 일자, 형량이 기록된 수형인 명부가 발견돼 법원의 재심 판결에서 행방불명 수형인들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37년 12월 13일부터 이듬해 2월까지 중화민국 수도였던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은 6주간 12초마다 한명씩 30만명의 양민을 학살했다.

난징대학살 기념관에는 ‘용서할 수는 있지만 잊어서는 안 된다. 과거를 기억해 미래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제주4·3이 나아가야 할 길도 이와 다를 바가 없다.

정부는 6·25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에 따른 과거사 사건을 해결하는 데 제주4·3을 롤 모델로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무고한 죽음을 당한 4·3희생자를 두 번 죽이는 일은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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