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풀 같은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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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언, 시인·수필가

자연은 가을맞이가 한창인데, 나를 들여다보니 적잖이 한심스럽다. 주전부리가 끊임없이 입의 휴식을 방해한다. 먹거리가 눈에 보이면 입에 넣기 바쁘다. 과일이나 과자류와 결별하지 못하는 건 당뇨의 여파라고 변명을 하지만 설득력이 없다.

중학생 시절이었을까. ‘살기 위해 먹느냐, 먹기 위해 사느냐?’라는 문장을 접하곤 피식 웃었다. 찰나의 머뭇거림도 없이 ‘살기 위해서 먹는 거’라고 응답하곤 오랜 세월 꺼내 보지 않았다. 허기진 시절의 어느 귀퉁이에선 먹지 않고 살 수 있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게 무얼까. 나이 들면서 인간은 먹기 위해 사는 존재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먹방’이 활개 치는 걸 보면 어느 정도 근거가 되리라 여기면서. 식욕은 생존의 기본 욕구이며, 욕구는 언제나 큰 욕구로 불타게 마련이다. 맛을 찾아서 떠나는 순례자 같다.

특별한 일은 오래 기억되듯, 잊히지 않는 식사가 있다. 74년 육군참모총장실에서 영타병으로 복무할 때 육군주임상사가 시내 음식점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초밥을 사 주셨다. 처음 보는 음식이라 눈치껏 따라갔다. 겨자를 간장에 풀어 넣고 듬뿍 찍어 먹었더니, 매운맛이 순식간에 온몸을 장악하곤 사정없이 눈물을 배출시켰다. 정말 매운 맛이었다.

총장을 방문하는 외국 손님에게 공관에서 만찬을 베풀곤 했는데, 메뉴를 본 적이 있다. 모두 외계어처럼 낯선 서양 음식이었다. 다행히 하나는 우리말 ‘제비집’이었으나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시골 처마 밑에 진흙과 지푸라기를 섞어 만든 제비집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물어보지도 못한 채 궁금증만 부풀다 사라졌다. 언젠가 검색창을 두들겼더니 바다제비가 타액과 깃털로 만든 둥지에서 재료를 꺼내 만드는 고급 요리라고 설명되었다.

음식은 하나의 문화이다. 그러므로 내게 혐오식품이 누군가에겐 맛난 음식일 수도 있다. 외국인은 꿈틀대는 낙지를 먹는 모습을 보면 기겁한다는데, 나는 뱀탕이나 심지어 곤충 요리라는 말만 들어도 토악질을 할 것 같다. 요즘 오르내리는 보신탕 논란도 세월 따라 자연스럽게 종결될 것이다.

둘째 며느리가 보낸 꽃게로 만든 아내표 양념게장이 밥을 훔치게 한다. 시장이 반찬이라면 ‘라떼는 말이 아니라 소’란 말처럼 터무니없게 들릴 테다. 밥맛은 혼자보다는 둘이서, 둘이 보다는 여럿이서 함께 먹을 때 고조된다. 혼자라면 어떻게 할까. 감사하는 마음에 비례함을 경험한다. 그리고 직접 만든 음식이 더 맛있다.

밥벌이의 어려움을 생각하면 밥은 벌이 아닐까 한다. 많은 사람이 생계를 꾸리려고 무수한 땀과 시간을 쏟는 게 현실이다. 에덴동산 이야기는 부질없다. 밥 앞에 나는 겸손하다. 집에선 누군가의 피땀을 연상하며 한 알도 남기지 않는다. 배곯은 사람들에 대한 예의이기라도 한 듯이.

밥만 식도를 지나는 게 아닌가 보다. 슬슬 무엇을 삼키려다 목구멍에 걸렸는지, 억 억 하는 소리가 요란하다. 상대적 빈곤감만 일으키는 너는 누구냐. 너는 땀의 의미와 축복을 생각한 적 있느냐. 갈개발이 사라지지 않는 야만의 시대여, 네게 저주를 퍼붓노니 당장 소멸하여라.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 견뎌내야 붉어지는 대추처럼 모두 어려운 시절을 견뎌내길 기원한다. 포기하지 않는 한 전진할 수 있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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