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떼는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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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애현 수필가

냉장고문을 열었다. 막상 때 되어 상을 보려면 찬은 없는데 용기마다 뭐가 그리 많은지 더러는 뚜껑을 하나하나 열어 내용물을 확인해야 할 때가 더러 있다. 넣은 사람도 그 내용물이 뭔지 몰라 확인 할 정도니 문제다. 냉동실이라고 뭐 크게 다르지 않다. ‘찬이 없을 때 써야지, 버리려면 아까운데 나중에 먹어야지, 이걸 버리면 죄받을 것 같은데’하는 구실을 붙여가며 공간만 내주고 있는 셈이다.

지난 추석 때만 해도 그랬다. 차례음식은 이집 저집 종류나 가짓수가 거의 정해져 있다. 적과 전, 나물이며 진설하는 과일의 가짓수만 봐도 그렇다. 음식 장만하고 나서 허리를 펼 때쯤이면 뻐근한 허리에 손을 갖다 대며 ‘잘 먹지도 않을 음식을 꼭 이렇게 해야 하나’ 싶어 군소리를 내뱉다가 불경스럽다는 생각에 말꼬리를 얼른 삼킨다. 배곯던 시절이나 먹을 게 차고 넘치는 요즘이나 별 다르지 않다. 요즘은 손가락 몇 번 클릭으로 입맛에 혹은 기호에 맞는 음식이 배달되다 보니 차례음식은 한 끼니 먹고는 그만이다.

그날도 그랬다, 멀쩡한 명절음식 놔두고 새로 반찬을 만든다는 것도 어정쩡하던 차에 ‘치킨 먹고 싶다’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한 녀석이 핸드폰을 잽싸게 만진다. 이미 주문완료다. 말하고 나서 야단맞고 먹을 바엔 아무 말 않고 있다가 먹고 야단맞겠단 심사였을까. 결제와 동시에 좋아 야단들이다.

잘 먹지도 않는 음식, 아까운 생각에 혼자 먹고 있자니 괜스레 심통이 났다. 먹는 것도 혼자는 참 멋도, 맛도 없다. 훅 버리면 될 것 같은데 그마저 용기 없고 죄스러워 이리 저리 굴리다 결국은 상할까봐 다시 끓여 놓게 된다. 막상 끓여 놓아도 먹지 않아 끓이느라 연료만 소비하고 공연히 부지런 파느라 몸과 마음만 바쁘게 굴렸다.

혼자 아까워하며 먹는데 음식 값보다 먹은 후 열량 소모 시키는 비용이 더 들것 같은 생각도 스멀거렸고, ‘맛좋고 먹고 싶은 것을 먹으면서도 몸 관리에 신경이 써야 하는데 굳이 안 먹고픈 것 까지 먹어야겠느냐.’며 아들 녀석 말 부조하는 품이 아까 배달음식 주문한 것에 대한 복선처럼 들렸다. 먹는 음식을 두고 애꿎게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이 그릇 저 그릇에 옮기다 결국 정리차원에서 과감히 버렸다.

어느 정당에 속한 한 정치인이 추석 언저리쯤에 모처럼 걸음 한 친지들에게 아픈 곳을 긁지 말라는 뜻이었을까. 대로변에 ‘라떼는 말이야…’ 하는 말로 시작된 현수막을 큼지막하게 내걸었다. 덩달아 ‘나 때는 말이야 …’ 하며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절, 가난이 자랑도 아닌 것을 자랑처럼 포장하여 훈육이랍시고 하던 것 자체가 이젠 웃픈 얘기가 되어 버렸다. 어린 날, 밥알만 흘려도 죄 운운하며 야단맞았던 기억이 퍼뜩 스쳤다. 소득이 천 불에도 못 미치던 시절 ‘라떼는 말이야…’를 삼만 불을 훌쩍 넘긴 지금, 그 생각을 들이대겠다는 것 자체가 어이상실일 수도 있겠다.

아주 오래 전부터 명절이나 제 음식은 크게 변함이 없다. 조금 달라졌다면 식재료에 일일이 손이 가던 것이 기계화 되었을 정도다. 내다, 네다 할 것 없이 먹을 것이 넘치는데 명절음식을 다시 꺼내놓기도 조심스럽다. 명절이나 제사 때마다 좀 줄여봐야지 늘 하다가 생각만 무성할 뿐, 또 제 풀에 주저앉기를 반복한다. 명절음식처럼 견고한 외형에 유연함을 바란다는 것은 요원함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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