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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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주 수필가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보니 허리도 아프고 눈이 침침하다. 몸도 풀 겸 가벼운 산책길에 나섰다. 가정에서는 저녁상을 물리지 않았는지 아직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더욱 홀가분한 마음에 두 팔을 내저으며 걸었다. 마스크를 살짝 올리고 내리고를 반복해도 누가 뭐라 하는 이 없어 좋다.

하지만 숨을 크게 쉬어도 왠지 시원한 느낌이 없다. 가슴이 뻥 뚫리는 날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날도 있다. 오늘은 후자다. 맛으로 비유하자면 밍밍한 공기 맛이다. 달달한 맛이 있는가 하면 상큼한 맛도 있고 매콤한 맛도 있다. 지금은 이 맛도 저 맛도 아닌 영역 불가의 맛이다. 중국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뿌연 먼지가 앞을 가리더니 쾌쾌하고 텁텁한 공기에 유쾌하지 않던 기억이 난다.

한 호흡이 모자라 생을 마감하는 이들도 있는데, 무슨 공기 타령이냐 나무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맛에도 궁합이 있다. 예를 들어 짜고 매운 국에는 심심한 전이 어울리고, 새콤한 나물이 있으면 바삭한 김이 먹고 싶기도 하다. 낮에 더웠으면 저녁은 시원해야 기분이 상쾌한 것처럼 모든 것에는 균형이 잡혀야 좋을 거란 생각이다.

여러 나라에 도착하면 그 나라만의 독특한 향을 맡을 수 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이 인도였는데, 향신료 냄새가 얼마나 강했는지 하늘까지 퍼진 듯했다. 향이 강해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나 있을까 고민했는데, 오히려 식탁 위의 요리접시를 서로 끌어당기며 먹었던 기억이 난다. 이국인의 입맛을 사로잡다니, 놀라웠다. 가장 인도다우면서도 세계적인 맛. 지금도 가끔 인도 음식점엘 찾아가곤 한다. 자극적인 향에 비해 부드러운 맛이 아직도 혀끝에 남아 있기 때문이리라.

바람이냐 깃발이냐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많은 스님들이 모여 강론을 듣고 있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었다. 한 스님이 깃발이 펄럭인다고 하자, 다른 스님은 깃발이 펄럭이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부는 것이라 했다. 그 말을 듣던 혜능스님은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펄럭이는 것도 아닌 당신들 마음이 움직이는 겁니다.”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나는 내 생각의 소산이라 했다. 생각을 바꾸면 나도 바뀌고 미래도 바뀐다는데 산책길에서의 공기 맛이 혹시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서 건조해졌던 내 기분 탓은 아니었는지 살펴보게 된다.

가로등 불빛으로 어둠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집집마다 무슨 요리를 그리 맛있게 하는지 냄새만 맡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구수한 된장찌개와 고등어 굽는 냄새, 칼칼한 김치찌개와 계란프라이, 화목한 저녁 식탁의 주인공들이다. 길가 풀 섶에서는 귀뚜라미들의 아리아가 시작되고 저마다 살아가는 일상들이 아름답기만 하다.

한 사회자가 모 가수에게 물었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서 좋겠어요.”하니 “좋고 나쁜 게 어디 있어요.” “그냥 잘 맞는 거지요.” 잘 맞는 게 아니라 잘 맞추었던 것이다. 조화란 그런 것 같다. 세상에 똑같은 건 하나도 없는데 모두 내 마음과 같아지기를 원한다. 둥근 것이 있으면 세모와 네모가 있어야 하고, 이 맛 저 맛이 있어야 제 맛을 찾을 수 있다. 좋고 나쁜 게 아니라 다른 것이다. 세상의 모든 다툼은 나와 다름에서 오는 오해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지혜.

나는 왜 오늘 공기 맛이 없다고 느꼈던 걸까. 공기 맛이 없는 게 아니라 다른 맛이라고 정정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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