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달뱅듸와 팽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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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돈,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애월문학회장

지난 봄 보리가 노랗게 익어갈 쯤의 일이다. 오라올레길을 걷기 위해 채비를 서두르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오라올레길을 걷기로 약속한 직장동료의 전화였다.

오라올레길은 다음에 걷기로 하고, 오늘은 오라동 일대에 4·3길도 개통됐는데 그중에서도 선달뱅듸를 가자는 것이었다. KBS제주방송국 옆 고지교에서 만나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선달뱅듸는 고지교에서 서쪽으로 약 500m 지점에 있다. 선달뱅듸에 도착하니 커다란 팽나무가 낯선 이를 반기고, 팽나무 주변 밭에는 익어가는 보리가 바람에 살랑거려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이렇게 정겨운 선달뱅듸지만 4·3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란 말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동광마을에 이어 6번째로 오라동 4·3길이 개통됐는데 선달뱅듸는 오라동 4·3길 제2코스에 속한다는 설명도 빼놓지 않는다.

오라동은 4·3초기부터 여러 가지 사건들로 유독 피해가 많은 지역이다. ‘오라리 방화사건’도 그중의 하나로 4·3의 전개과정에서 상황이 극도로 악화되는 계기를 맞는 사건으로 뽑힌다.

마을을 설촌한 주민의 이름에서 유래한 선달뱅듸에는 4·3 당시 7가구가 어느 마을과 다름없이 오순도순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1948년 11월 토벌대에 의해 소개령이 내려지고 초토화 작전으로 마을은 불에 타버렸고, 이에 마을사람들은 이주를 해야만 했다. 이렇게 불타버린 마을은 끝내 복구되지 못하고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다.

선달뱅듸에 가보면 4·3 이전의 평화롭고 아늑한 마을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주민들이 걸었던 올레와 하천의 흔적들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고, 한그루 커다란 팽나무가 그날의 슬픈 역사를 말해주는 듯 우뚝 서 있다.

팽나무 밑동을 보니 어림잡아도 300년은 넘어 보인다. 그래서 이곳 선달뱅듸에는 이 팽나무가 있어 유명하다. 나무에서 뻗어나간 가지는 그네타기에도 적당해 아이들이 그네를 만들어 타고 놀았다고 한다.

잠시 나무에 기대앉아 이마에 맺힌 땀을 식히며 그네를 타며 노는 아이들이 천진난만한 모습과 마을 사람들이 정겨움을 떠올려 본다. 어쩌면 이 팽나무가 없었다면 선달뱅듸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선달뱅듸가 없었다면 팽나무도 이름값을 하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모진 비바람과 4·3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잘 견뎌낸 이 팽나무는 마을의 지킴이 역할을 톡톡히 해왔던 수호신격인 나무이기도 하다. 마을사람들과 동고동락을 해왔고, 켜켜이 쌓인 시간의 흔적이 더해져 진정한 가치를 더하고 있다.

장구한 역사 속에서도 온갖 풍상의 흔적을 간직한 처연함, 그러한 세월을 이겨낸 대견함, 말로 표현하기 힘든 복잡 미묘한 감정이 한꺼번에 솟구침을 느낀다.

비록 이 나무가 애물단지가 되어 언젠가 베어 버질지 모르지만, 역사적 상징성이 깃든 만큼 팽나무를 잘 보호하고 가꾸어 나가는 일은 우리가 가져야 할 몫이기도 하다.

이름도 아름다운 선달뱅듸는 도심에서 가깝고, 역사적인 상징성이 있어 탐방객 방문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모쪼록 선달뱅듸가 4·3의 사연과 그 흔적을 보호하고, 후대에 교훈이 되어 건강하고 바른 사회로 나아가는 토대가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선달뱅듸에서 길을 나서는데 팽나무에서 그네를 타며 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환청으로 들리는 이유가 무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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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심 2021-10-30 21:22:57
선달뱅듸 퐁낭에서
아이들 소리를 느꼈습니다.
이곳을 잘 보호하고, 잘 가꾸어
4 ·3 역사를 기억하고
우리들의 삶이 소중함을
배울수 있는 장이 되길 바랍니다.

강상돈님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이영옥 2021-10-19 19:31:54
선달뱅듸에 가서 팽나무를 안아 보아야 겠습니다.
제주의 사연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