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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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권일, 농업인

파스텔톤 노르스름한 감귤열매들, 초저녁 별들처럼 감귤원 곳곳에서 얼굴 내밀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영주십경의 한 폭인 귤림추색(橘林秋色)’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 머지않아 소슬하고 삽상한 가을바람결에 고향의 들판은 감귤의 황금빛 물결로 차고 넘실거리며, 또 한 해의 지평을 향해 뉘엿뉘엿 저물어 갈 것이다.

올해도 농부의 시간들은 녹록하지 않았다. 전대미문의 폭염이 기승을 부리며 진을 쏙 빼놓더니, 난데없는 가을장마 찾아와 홍역을 치러야 했다. ‘가을비는 장인 구레나룻 아래서도 피한다고 할 정도로 강수량이 적다. 그런데 웬걸 꼬리를 잇는 비날씨로 병해충 방제 시기를 가늠할 수 없어 노심초사했고, 기껏 살포한 농약이 예보에도 없던 국지성 호우로 씻겨나가 도로(徒勞)가 되기 일쑤였다. 게다가 코로나가 가락동 농산물시장을 덮쳐 경매가 제때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바람에, 기대 속에 출하된 하우스 가온 감귤과 극조생 감귤 가격이 폭락해, 농부들의 기대가 무너지며 큰 생채기를 남겼다.

몇 개 태풍의 위협도 있었지만, 천우신조로 빗겨 가 한 시름 놓았다. 태풍의 위력과 폭력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이지만, 특히 비닐하우스 농가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공포의 재해이다. 폭우는 물빠짐 좋은 화산회토라는 지질 특성으로 견딜만 하지만, 강풍 앞에서 비닐은 휴지조각에 불과하다. 심하면 하우스 철골 자체가 엿가락처럼 휘고, 구조물들이 통째로 전도되는 경우도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몇 년 전 태풍으로 비닐하우스가 난장판으로 주저앉아 수확을 앞둔 감귤이 막대한 피해를 입고 보수공사를 하느라 애를 먹었던 기억이 아직도 벌벌 떨리는 두려움의 트라우마로 내 가슴에 남아있다.

그래도 요즘처럼 수확을 앞둔 감귤원에서의 미음완보(微吟緩步), 땀 흘린 농부들에게만 허여되는 최고의 보상이다. 이제 농약살포를 비롯한 농사일도 얼추 마무리가 되었겠다, 서서히 갈무리만 준비하면 된다. 수확이 대박이었으면 좋겠지만, 욕심의 싹을 미리부터 지그시 눌러 놓는다. 그저 주어진 몫에 만족하는 안분지족(安分之足)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그나저나 세상은 여전히 요지경이다. 정치권의 내로남불길고 가늘게이어지는 지긋지긋 코로나, 위기의 임계치를 넘은 국가와 개인 빚, 뜬금없는 북한의 도발, ‘화천대유의 기상천외 돈잔치 등으로 민초들의 걱정과 짜증만 늘어 간다. ‘오징어 게임에서 죽어나가는 가붕개’(가재, 붕어, 가재)들처럼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하루하루 버티며, 나라와 인간에 대한 배신감과 무력감에 맥이 풀린다. 그런데 시절이 하수상한데도, 청와대에서는 한복의 날 맞아, 화기애애한 한복차림 국무회의가 열렸다. 허참! 사또 차림 의전 비서관이, 대통령보다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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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연 2021-10-20 14:46:26
점차 기상이변이 일상의 변화를 초래하고 있네요.
농부 뿐아니라 평범한 이들의 일상도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환경운동을 실천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