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이면 됐지, 두 번씩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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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 시인/4·3조사연구원

제주 섬 바닷가 마을 올해 춘추 100세인 할머니 이야기다. 바닷가 마을 여느 여자들처럼 할머니도 어려서 물질을 했다. 14세부터 시작한 물질로 일본이며 심지어 이북에까지 원정물질을 다녀온 상군이었다. 열아홉 나이에 유학 갔다 온 동네 청년과 결혼을 했다. 해방 몇 년 전이었다.

남편은 부모님의 성화에 학업 중임에도 고향으로 돌아와 결혼했다. 참 착한 이였다. 같은 동네에 살았지만 할머니도 결혼 전까지 남편을 만난 일 없었다. 천생연분인 줄 알고 결혼했다. 남편은 결혼 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남은 학업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해방된 후였다.

남편이 돌아온 후 고향집 근처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근무하는 학교 근처 방 한 칸으로 시작한 살림이었지만 남편은 학교일 마치면 곧바로 집에 와서 텃밭을 가꾸고 아이들을 돌봐줬다. 부모님 댁에도 자주 방문하여 집 청소도 해드리고 식사도 같이 하곤 하던 참 어질고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남편은 선생 월급을 3년 동안 꼬박꼬박 모아 집터를 샀다. 할머니 신혼생활 3년, 아니 결혼생활 3년은 꿈결처럼 행복한 나날이었다. 그러나 1948년 여름, 군인들이 남편을 잡아갔다. 아무도 몰랐다. 남편이 무엇 때문에 잡혀갔는지 왜 잡혀갔는지 어디로 잡혀갔는지. 잡혀간 지 1년 쯤 지나, 남편이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 말도 묻지 못했다. 그때는 그런 세상이었다.

집에 돌아온 남편은 더 이상 학교에 출근하지 않았다. 학교 근처에 살 이유도 없어졌다. 할머니와 남편은 사두었던 집터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집터는 시댁 근처였다. 흙으로 벽을 바르고 도배를 막 시작할 참이었던 1950년 여름, 청천벽력 같은 일이 다시 벌어졌다.

아기를 부모님께 맡기고 동서네 밭에 고구마 심으러 간 날이었는데 집에 와보니 남편이 없었다. 누구도 남편의 행방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다. 소문에 경찰들이 잡아다가 죽였다고 했다. 바다에 싣고 가서 시신을 버렸다고 했다. 어느 누구도 자초지종을 알거나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1950년 음력 6월 14일. 남편이 사라진 그 날짜에 맞춰 제사를 지내고 있을 뿐이다.

아이는 딸 하나 아들 하나 두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다. 딸은 일찍이 어려서 죽고, 아버지 찾으러 가겠다며 집 떠난 스무 살 아들은 아버지 따라 영영 가버렸다. 서방 죽고 아이들 죽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목숨은 붙어 있었지만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세월이었다. 죄스럽고 부끄럽기만 했다. 그래도 고마운 이들이 있어 남편이 형무소에 갔었고 예비검속으로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수형인명부라는 것에 남편 이름이 올라있는 것도 알게 되었다. 4·3 그 난리 통에 잡아가서 징역을 살렸으면 됐지 다시 잡아가서 죽여 버리는 경우는 무슨 경우냐고 복장이 터진다며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셨다.

“억울한 것은 서방 잃어버린 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 떠나보낸 거! 그중에서도 서방 시신조차 못 찾은 게 제일 억울해! 내 나이 100살. 재판해서 우리 서방 죄 없다는 판결을 받아서 그 소식을 갖고 남편에게 가고 싶어. 기막힌 세월, 이 일을 하려고 오래 살아졌는가 봐.”

이제야 오래 살아있는 게 미안하지 않다고, 살아있는 이유가 있었다고 스스로를 달래는 할머니께 하루빨리 좋은 소식이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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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연 2021-10-31 06:27:54
아, 이런 백년을 어찌 살았을까요?
우린 이런 걸 왜 모르고 살았을까요?
옆 집 삼춘 일인데도요?
아픈 역사 일러주시는 작가님 고맙습니다.
글이 참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