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바라보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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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눈물은 사람만 흘리는 전유물이 아닌 것 같다. 동물도 슬프거나 괴로울 때면 뜨겁게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눈 안에 가득 고였다가 주루룩 흘리고 있으니 정녕 눈물이라 할밖에 없잖은가.

어느 날 갑자기 우시장으로 팔려가는 송아지나 어미 소, 억지로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가 눈물을 흘리거나 TV 동물농장에서 눈물 흘리는 개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뿐 아니다. 경주마가 자신이 납득할 수 없는 패배를 당한 후 분통을 터뜨리며 눈물을 흘리기도 한단다. 참지 못하겠다는 격한 감정의 표현이다. 물론 안구 건조 방지를 위한 생리일 뿐, 슬픔이나 분노를 표출하는 눈물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한데 야생동물 중에도 슬플 때 정말 사람처럼 얼굴을 찡그리며 눈물 찔끔 감고 입에 힘을 주며 눈물을 참는 표정을 짓거나 소리 내며 울음을 터뜨리는 종들이 있다. 인간의 슬픔의 감정을 표현하는 몸짓언어인 눈물이 사람만의 것이라고 하기엔, 만물의 영장이란 기반을 내세우는 것만 같아 좀 그렇다.

여자의 눈물이 무기로 쓰이기도 한다. 남성의 공격성을 단 한 방에 누그러뜨리는 놀라운 화력을 지닌다. 엄청난 무기인 것은 분명하다. 여자의 눈물에 약한 게 남자라 하고 있으니 모를 일이다.

남자가 눈물을 보여서는 안된다고 한다. 특히 상남자가 눈물을 보이면 ‘찌질하다’고 비웃는다. 남자로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본인이나 남이거나 속으로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초등학생 때 조금만 하면 소리 내 울던 아이가 있었다. 울보라고 만날 따돌림을 당하면서도 그래도 또 울곤 했다. 순진하고 심성 좋은 아이였다.

역사 속에서 보면, 강한 남자일수록 여러 사람 앞에서 눈물 흘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태조 이성계, 태종 이방원, 정조 같은 강력한 왕권을 가진 자가 여러 신하들 앞에서 눈물 지으며 통곡했다.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인간미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매우 소중한 장면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남자가 눈물을 흘려서는 안된다는 고정관념에 대한 역발상, 그러니까 남자의 눈물은 더 강력한 것이라 여겨 곧 무기로 사용하기도 했다.

주유의 명으로 형주를 돌려 달라고 요구하기 위해 노숙이 찾아왔을 때, 노숙의 일장 연설에도 유비가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펑펑 흘린 일이 있다. 제갈량이 말 몇 마디에 노숙은 마음이 약해져 형주를 돌려달라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동으로 돌아왔다. 유비의 눈물은 전부 제갈량의 계략이었다.

눈물은 눈물샘에서 흘러나오는 분비물, 오줌이나 땀같이 나오는 생물학적인 노폐물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사람이 경우는 다르다. 아무런 감정적 자극 없이 나오지 않는다. 어떤 감동으로 마음이 심히 꿈틀거릴 때 나오는 것임을 나이 들면서 알아 간다. 그전에는 눈이 있어 눈물을 흘리는 줄로만 알았는데, 이즈음엔 감정이 메말라 감동할 일이 훨씬 줄어드니 눈물도 말라 가는 것 같다.

하지만 이따금 역현상을 만나기도 한다. 아이들이 고난 앞에 비틀거리거나 평생을 함께하는 반려가 심하게 아파하는데 그 아픔을 같이하고 나눌 수 없을 때, 혼자서 지는 해를 마주했다가 그만 울어 버릴 때가 있다. 어깨 들추며 숨죽여 오열하고 나면 왠지 후련하다. 모든 감정의 끝은 눈물이다. 알알이 꿰차진 못하나 흘려보낸 뒤에야 마음으로 새기는 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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