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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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양진 수필가

우리 집 대문 오른쪽 끝에 눈을 두면 가늘고 둥근 노란색 끈이 보일 게다. 그 끈을 천천히 잡아당기면 열쇠 하나가 작은 물고기처럼 딸려 올라온다. 그것은 시댁 식구들과 친구들 그리고 택배 기사와 수도·전기 검침원 등 아는 사람만 아는 대문 열쇠다.

사위가 조용할 때 아무런 예고 없이 열쇠 끈을 잡아끄는 금속성 마찰음은 귀를 쫑긋하게 한다. ‘누구일까.’ 열쇠가 열쇠 구멍에 들어가는 순간 성마른 궁금증에 현관문을 밀치고 나간다. 오늘도 그랬다.

오랜만에 큰시누 아들이 대문 열고 들어왔다. 목욕탕 갔다 오는 길이라며 성급히 줄자를 찾는다.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배를 내밀며 허리 치수 재 달라는 폼이 몸무게가 어지간히 늘었나 보다.

줄자를 길게 잡고 허리를 잰다. 젊고 날씬했던 조카도 어느새 마흔 중턱에 다다랐다. 나이뿐만 아니라 체형도 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느 아저씨다. 먹는 것은 좋아하지만 운동은 싫어하는 중년 남성의 배둘레햄.

조카가 자기 허리를 빙 두른 줄자의 숫자를 확인한다. 갈증이 난다기에 음료수를 내밀었더니 그냥 물 한 잔 달란다. 무심한 척 웃음을 보였지만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묻지도 않았는데 살찐 연유를 주섬주섬 꺼낸다. 친구들과의 잦은 술자리, 식사 때마다 곁에 두는 음료수, 야식으로 먹는 라면…. 부푼 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이런저런 말이 오가고 있을 때 건넌방에 있던 남편이 사탕 봉지를 들고 나왔다. 조금 전 음료수를 마다하던 조카의 그 의지는 어디로 달아났을까. 실실 웃음을 흘리며 사탕 봉지 안으로 손을 넣는다. 목이 짧고 굵은 곰 두 마리가 입 안의 사탕을 바삭바삭 씹고 있다. 삼촌과 조카가 참 닮았다. 외탁하여 비만 유전자가 있다는 조카의 말이 빈말은 아닌 듯.

남편은 조카와 어릴 때부터 티격태격하며 자라 그런지 만나도 다정함보다 뭐 꼬투리 잡을 게 없나 살피는 눈치다. 금연한 남편에게 오늘 조카의 담뱃갑은 근사한 먹잇감이 되었다. 무익한 것이 뭐가 좋아 아직도 끼고 사느냐는 둥 잔소리를 해댄다. 그러자 조카가 넉살스레 되묻는다. 사는 재미가 이것뿐인데 이마저 못 한다면 무슨 낙으로 사냐고. 그러며 덧붙이는 말이 자기는 매우 건강하여 나중 1인 가구로서 100세까지 살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단다.

그 호언장담이 객기처럼 다가와 속웃음이 났다. 술 담배와 친하고, 배가 나오고, 야식을 즐겨 먹고, 달달한 맛에 중독되고, 잘 걷지 않는 사람이 장수했다는 말을 여태껏 들은 적이 없기에.

조카가 던진 말 속에 결혼을 뒷전에 둔 ‘1인 가구’라는 표현이 자꾸 걸린다. 마른나무처럼 버석하게 늙어 갈 생각인가. 한 가정을 이뤄 지지고 볶는 그런 삶에서 느끼는 행복을 포기하려는 걸까.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에서』라는 소설 속 페르시아 양탄자 이야기가 떠오른다. 인생의 의미를 양탄자를 짜는 것과 비유한 부분이 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다양한 무늬를 짜는데 그 많은 무늬 중 가장 뚜렷하고, 완벽하고, 아름다운 무늬는 성장하여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먹고살기 위해 일하다가 생을 마치는 무늬란다. 평범한 삶이 가장 완벽한 삶이라는 것이다.

조카에게 외롭지 않은 삶을 위해 평범한 무늬를 짜라고 하면, 똑같은 무늬는 식상하다고 반론하려나. 살아가는 데 정답이 없다는데 내가 괜히 남의 인생에 오지랖을 떠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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