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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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봉, 수필가·시인

서른두 살에 사업을 시작했다. 1990년대 초 제주도는 관광 붐을 타고 수많은 사람이 들고났다. 그 호황 속에 너도나도 관광기념품 제조와 도매사업에 뛰어들었고 살아남기 위한 경쟁은 전쟁을 방불케 했다. 신제품 개발이나 재료를 구하러 전국을 누빌 때는 두 시간 쪽잠으로 한 달여를 버티기도 했다.

서울과 부산의 무역회사와 공장을 찾아다니며 품질 좋은 재료를 구하려고 발품을 팔았다. 제조업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일이다. 매입 거래처 사장님들 눈엔 내가 사업을 하기엔 어리게 보였을 것이다. 뭘 믿고 거래를 할까 꺼리는 모습이 보였으니까.

만드는 상품 중에 벽시계와 탁상시계도 있었다. 정밀공업은 여러 가지 재료가 필요하다. 모든 재료를 구비한 회사의 제품을 일괄 사면 편하지만 값이 비싸다. 불편하지만 부속들을 개별적으로 구입하고 만들어야 생산단가가 낮아진다.

시곗바늘을 구해야 했다. 서울로 올라가 전자 상가, 종로, 청계천을 오가며 수소문 끝에 어렵사리 시곗바늘을 만드는 공장을 찾아냈다. 그것만 생산하는 곳이라면 서울 변두리에 비좁고 허름할 거란 생각은 회사 앞에 이른 나를 압도했다. 신식 5층 빌딩 벽에 걸린 커다란 간판이 놀라웠다.

영업사원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50대로 보이는 사장님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점심을 같이하자 한다.

양쪽에 줄지어 선 식당 골목을 걸었다. 그는 키가 160cm도 채 되어 보이지 않은데 당당한 걸음걸이며 양복이 잘 어울렸다. 함박눈 내리는 1월의 한기가 몸을 파고들건만 그는 흔들림이 없었다.

뜨거운 해장국을 조용히 떠먹으며 지나온 날을 회상하듯 말한다.

“최고가 되려면 품격을 잃지 말아야 하네, 내가 곧 상품일세. 만드는 물건도 주인을 닮지. 보잘것없는 바늘 하나지만 정성을 다했네. 그런 내게 작은 바늘이 빌딩을 안겨 주었어. 자넬 보니 맨주먹으로 시작했던 내 젊은 시절이 문득 떠올랐네. 작은 시곗바늘을 찾아 제주도에서 올라왔다는 건 최선을 다하겠다는 결의가 보여.”

그는 회사 곳곳을 구경 시켜 주었다. 지하는 공장, 1층엔 전국으로 발송되는 제품 상자가 그득했다. 이층은 사무실, 3층은 시곗바늘을 디자인하는 직원들 손이 분주했다. 4, 5층은 사옥이라 한다.

시침, 분침, 초침 한 조에 25원, 1만 조를 주문했지만 작은 상자 하나면 족할 것이다. 무게도 가볍고 구매 가격도 높지 않다. 하지만 그와 잠시 나눈 대화의 가치와 무게는 수십 톤으로 다가왔다. 품격이 소중하다는 이치를 새겨들었다.

최선을 다해 살았다. 말 한마디, 사업계획서 글 한 줄에도 가벼움이 없는지 검토하고 또 확인했다. 그 덕분일까, 그분에 비할 바 아니지만 작은 성공을 이뤘다.

대선 준비로 후보자들이 경선에서부터 헐뜯고 모함하고 온갖 볼썽사나운 말들이 오갔다. 정책을 논하는 건 일부일 뿐 대부분이 상대를 헐뜯었다. 사람들은 편끼리 했던 경선에서조차 진흙탕 싸움인데 이제 본격적인 개싸움이 시작이라 깎아내린다. 대통령 후보감이라면 상대의 장점을 거론하는 품격을 보이고 참신한 정책을 들고 나와야 하건만 그런 건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을 보면서 불행한 역대 대통령들과 나라의 앞날이 암담하여 한숨만 나온다.

대다수 국민의 마음엔 후보 모두 깜냥 없어 보이는 것 같으니 품격을 갖췄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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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옥 2021-11-11 12:03:30
중요한 시절에
인생의 멘토를 만나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