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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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가을 속에 앉자고 아파트 동 사이 뜰에 내렸다, 늦가을의 싸한 기운이 몸을 휘감는다. 내 안에 차 있던 묵은 찌꺼기들이 삽시에 수습되는 것 같다. 낡은 것을 정리하듯, 묵은 걸 내놓고 새 걸 안으로 들이는 신구의 교체가 빠르게 진행되는 기미다. 가을이 하는 일이다.

거목의 위의에 끌려 늙은 벚나무 아래 앉았다. 줄기가 아름인 나무는 팔방으로 뻗은 수많은 가지와 셀 수 없는 잎들로 사람을 압도한다. 이 아파트가 여기 들어선 게 20년 전이다. 그때 묘목이었을 것이니, 그새 꾸준히 성장의 역사를 자기만의 필력으로 서술해 왔겠다 싶다. 풍상을 견뎌 낸 나무의, 만만하게 뿌리칠 수 없는 존재감에 내가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이다.

눈앞의 인도 블록 위며 화단에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다. 아침에 청소 아줌마가 다녀간 자락인데, 후로도 쉴 새 없이 잎이 지고 있는 게 아닌가. 바람 없는 날인가 했더니 웬걸 씽 하고 한 줄기 갈바람에 잎들이 사각거린다. 위에서는 아래로 살랑대며 지고, 공중제비 넘으며 나부끼는가 하면, 아래서는 쌓였던 잎들이 사방으로 흩날려 스산하다. 그런데도 낙엽에서 풍기는 가을 냄새가 진하고 짙다.

내 무딘 후각을 후빌 만큼 강렬하니, 아직 낙엽에 체취가 있고 체온이 남아 있어 그런가, 내가 갑자기 민감해진 걸까. 늘그막에야 전에 없던 감성이 돌기처럼 일어나 꿈틀거리니 모를 일이다. 누구나 숲길을 거닐면 시인이 된다 했다. 작은 숲이지만, 가을 숲속이라 이제 정녕 시인이 되려나. 메모 수첩을 꺼내 숲에서 내리는 가을 서정 몇 조각 받아쓰기해야겠다. 하늘을 우러른다. 나무가 낙엽으로 가지들을 드러내 헤싱헤싱한데, 가지 사이로 파란 하늘이 남실거리며 들어온다. 가을 하늘이 내리더니 머릿속이 먼지 알갱이 한 톨 없이 말갛다,

왜 낙엽을 쓰는가. 낙엽이 쌓여 가을인데, 한철 그냥 둔다고 무엇이 덧날까. 겨울이면 강풍에 다 날릴 것을, 저것들 나무 아래로 내려 흙이 될 것인데, 시인은 “시몬, 너는 좋지 않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하고 읊었잖은가.

놀랐다. 낙엽이 나를 촉촉하게 하고 있음을. 오늘 알았다.

바람 유순하고 가을볕 좋은 날이었다. 길 건너 도심의 소공원에 가 벤치에 등 대고 비스듬히 앉았다. 숲을 지나 비둘기 여남은 마리가 수평으로 나래를 펴더니 내 앞으로 내린다. 한시도 쉬지 않고 바지런히 움직이는 걸 보니 저리 몸 통통한 이유를 알겠다.

한데 가만 보니, 녀석들 연해 맨바닥에다 빈 입질을 하며 내게 다가온다. 삼가거나 거리낌 없는 접근이다. 여기 간간이 오는 나와는 임의롭지 않을 텐데도 상관없는 모양이다. ‘당신이 거기 앉아 있는 거나 우리가 이러는 거나 조금도 다를 게 없지 않소.’ 하는 것 같다. 언제 저는 속이라도 다 내주겠노라 인간에게 선언했다는 건가. 몇 번 바닥에 발 동동거리는 시늉에도 꿈쩍 않는다. 이렇게 인간 친화적이었나. ‘이토록 자연을 모르고 관심도 없었구나. 먹잇감이라도 한 줌 갖고 올 것을.’

비둘기와 나는 함께 지내야 할 작은 개체였다. 오늘 알았다.

미켈란젤로가 어느 날, 조각 작품 하나를 밤새워 완성하고 밖으로 나오다 크게 좌절했다 한다. 그를 무릎 꿇게 한 것은 햇빛 머금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이었다. 자신은 평생을 해도 미치지 못할 자연의 창작물, 그는 비로소 그걸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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