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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복금 수필가

카페 안은 훈훈했다. 익숙한 기타 선율과 커피 한 잔으로 누려보는 여유, 무심코 밖을 보았다. 유리창 가득 드리운 나뭇가지로 새들이 모여들더니 짙푸른 잎 속으로 들어가 버려서 보이지 않았다.

새들은 그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잎사귀들만 흔들어 놓을 뿐 떠날 줄 몰랐다. 새들이 다시 보이길 기다렸다.

그 아이 집 창밖으로도 나무가 보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아이가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만나는 아이가 나에게 물었다. 꿈이 무엇이었느냐고. 난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고 대답했다.

학교 가는 길, 코스모스가 피었다. 친구들은 코스모스를 똑똑 꺾으며 가는데 나는 코스모스가 아플까 봐 꺾지 않았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데 코스모스가 나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아침에 나를 꺾지 않아서 고맙다는 듯이 웃는 것 같았다.’

숙제로 제출했던 글짓기였는데 선생님이 앞에 나와서 읽어보라고 했다.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그 후 선생님에게 잘 보이려고 숙제도 더 열심히 하고 나도 커서 선생님이 되고 싶어졌다.

그러나 선생님이 되지 못했다. 혼자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환경이 나를 주저앉히고 말았다. 출발지점부터 다른 상황이었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그 출발선에서 애를 쓴 것이었다. 인생이 생각한 대로 흘러가기만 하는 것은 아닌데 어린 나이였던 나는 그 일을 인정할 수 없었다.

며칠째 비바람이 반복되고 있다, 초가을의 기억이 아련해질 만큼 바람이 제법 차다. 그래도 나무는 잔가지마다 풍성한 잎을 내고 거친 껍질 속으로 아픈 시간을 쌓아온 듯 그 모습이 의연하다. 세찬 비바람 속에서도 뿌리를 뻗고 가지를 키우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나무의 넉넉함은 누가 주는 것일까.

아이들을 만나는 또 다른 이름의 선생님. 저마다 나이와 성장 배경, 성향이 다르지만 배움의 과정에 있어서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다, 아이들과 마음과 마음의 교감이 있기에 만남은 늘 반갑고 기다려지는 것 같다. 아이들을 만나면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난감할 때가 있다. 그들의 마음을 정확히 읽지 못하거나, 읽었다 해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안타까운 순간이 있다. 맞고 틀림의 차원으로 풀지 못하는 민감한 관계들···.

초등학교 때 선생님은 아이들을 대할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기억 속의 선생님은 늘 따뜻한 눈빛으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가끔은 실망하기도 하고 힘겨울 때도 있었을 텐데, 항상 웃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 조건 없는 사랑이 아니었을까. 만족하면 만족한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눈앞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되어질 모습을 기대하며 부어주던 사랑이 아니었을까.

다시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 속으로 깊이 숨어들었던 새들이 순간 포르르 날아올랐다. 잎사귀에 숨은 먹잇감이라도 잔뜩 먹은 것일까. 힘찬 날갯짓으로 창공을 향해 날아가 버렸다.

선생님을 뜻밖의 장소에서 만났다. 일흔을 넘긴 고운 얼굴의 선생님은 나를 기억해주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선생님은 나의 형편을 잊지 않고 안부를 물어주었다. 중년이 넘은 나에게 선생님은 예전의 선생님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도 남았다.

바람이 그쳤다. 새들이 날아가 버린 나뭇잎 위로 햇살이 내려와 반짝였다. 선명한 나무 그림자를 밟으며 지나가는 아이들이 재잘대며 새소리를 대신했다. 그 소리가 맑고 청량하다.

선생님, 조금 있으면 할머니 선생님 되겠네요.’라며 장난스럽게 웃던 그 아이가 다시 생각났다. 할머니가 되어서도 초등학교 때 선생님처럼 마음 가득 아이들을 품을 수 있을까.

아이들을 만나러 카페를 나섰다.

늦가을 하늘이 참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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