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선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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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흥식 수필가

포도 위에 낙엽들이 뒹굴고 있는 어느 늦가을 화창한 날을 택하여 군 졸병 시절에 나를 많이 아껴주시고 배려해 주시던 대전시에 살고 있는 군 선배를 꼭 만나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공항에서 청주행 비행기를 탔다.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그는 한씨인 선배이다. 해군신병훈련소를 수료한 다음 진해 군의학교를 수료하고 첫 임지로 발령을 받은 곳이 포항해병사단이었다. 엄밀히 그는 상관인데도 전연 졸병이라고 무시하지도 않았었다.

너나할 것 없이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남성이라면 병역의무를 져야한다. 나도 병역의무를 이행하기 위해서 해군으로 지원 입대키로 하고 해군신병훈련소를 거쳐서 군 생활이 시작되었다. 군대라는 사회는 명령에 죽고 사는 집단이지만 따뜻하고 인자한 선배를 만나서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군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장기하사관이란 사람들은 졸병들이 기압이 빠졌다고 트집을 하며 집합시켜서 입 다물라고 하고 아구턱을 돌리기도 하고 빠따를 치기도 한다. 소위 군기를 잡는다는 이런 일은 군필자들이라면 다 아는 일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졸병 시절 휴가 가는 것은 너나없이 모든 장병들이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일이다, 나도 휴가를 받고 고향에 다녀왔는데 휴가에서 귀대해 보니 이게 웬일인가, 보급품인 새 담요가 행방불명이 되었지 않은가! 말도 못하고 훗날 선배에게 들었는데 진급도 못하고 장기하사로 근무하는 불쌍한 그들이 팔아먹었을 거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한평생을 살아보니 그래도 내가 가장 편안하게 지낸 세월은 군대생활이었다. 왜냐면 나라에서 먹여주고 입혀주니 천하 졸병 무사태평으로 아무런 걱정도 없었으니까!

나는 그 선배에게 몇 번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고 1년에 한두 번 전화 통화도 했으나 그것으로 선배에 대한 도리를 다한 것으로 자위하며 살아온 세월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모습은 어떻게 변했을까. 인자한 모습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이 더 깊고 넓어지셨을 것이다. 대략 5년 전에 여러 번 전화를 하였으나 전연 통화가 안 되었다.

한 시간쯤 비행해서 청주공항에 도착하고 버스를 이용하여 대전시로 향했다. 오늘 그 선배를 만날 수 있을까하고 염려하는 마음으로 대전시 터미날에 도착하였다. 오늘이 토요일인 것도 생각 못하고 모동 주민센터를 찾았으나 낭패를 당했다.

그렇지만 그냥 포기할 수 없어서 모 초등학교 근방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기에 그 학교를 찾기로 했다. 어느 골목에서 선배님이 웃는 얼굴로 내 앞에 나타날 것 같은 환영에 빠지기도 하면서 모든 일을 즉흥적으로 하다보면 앞뒤가 안 맞는 걸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된다. 존경하는 선배님을 만날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로 초등학교 주변 이 골목 저 골목을 몇 시간을 헤매며 찾아봤으나 모두가 허사였댜.

대전시에서 귀가하고 해당 동주민센터 동장에게 전화해서 사정을 얘기하고 그분이 살아 있는지만 알려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한참 후 동장으로부터 전화 연락이 와서 받았더니 찾아봤으나 끝내 행방을 알 수 없다는 통보였다. 아마도 돌아가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멀리 산다는 핑계로 찾아뵙지 못한 자신이 이렇게 후회가 되고 부끄러울 수가 없다. ‘잊을 수 없는 존경하는 선배님! 정말 죄송합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하고 진심으로 용서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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