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릇노릇 익어가는 빨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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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미숙, 재릉초등학교 교장·수필가

볕이 좋다. 아침부터 서너 차례 세탁기를 돌렸다. 버블 불림기능을 추가해 빨래끼리 말려지지 않도록 부풀려진 세탁물을 꺼내 베란다 빨래건조대에 착착 털어 가지런히 널었다. 상큼한 세제 향이 폴폴 날린다. 흠흠! 그 향이 너무 좋다. 빨래걸이에 하나하나 널 때마다 상큼하다. 자동세탁건조기에서는 맡을 수 없는 냄새다.

올해 1월에 남편은 생일 선물이라며 가전제품을 싹 다 바꿔주었다. 잘 쓰던 세탁기가 고장이 나더니 줄줄이 돈 달라는 듯이 청소기마저 고장이 났다. 사실 지금 사는 집에 이사를 오면서 산 제품들이니, TV는 무려 19년이나 같이 살았다. 코로나19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성능 좋은 제품의 욕구도 한몫했다.

드럼세탁기와 건조기도 세트로 샀다. 기존 드럼세탁기에도 건조 기능이 있었지만, 주위에서 단독 건조기가 좋다고 들을 때마다 부러웠었다. 거실이 넓어서 주방에 설치했더니 TV 광고 장면 못지않게 세련된 실내 분위기가 연출 되었다.

한동안 신나게 사용했다. 기능이 다양해서 성능별 코스별로 세탁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빨래 종류와 상태에 따라 다이얼을 돌려가며 AI 맞춤형 세탁이 된다. 굳이 세탁소에 안 가도 웬만한 빨래는 집에서 알아서 다 해준다. 제일 큰 초대형 용량이니 이불빨래도 거뜬히 소화해낸다. 3시간 정도면 빨래는 뽀송뽀송 건조되어 나왔다.

그런데 처음 사들이고 겨울 한 철 신나게 사용하고는 디지털에서 다시 아날로그로 회귀했다. 그럴 때마다 사서 고생한다며 남편과 아이들은 핀잔했다. 빨래가 바람에 시원하게 말려가는 정겨운 모습은 끊을 수 없는 아날로그의 유혹이었다.

오늘도 베란다 빨래건조대에서 느린 시간의 흐름 속에 빨래를 말린다. 기울어가는 가을 햇살에 노릇노릇 빨래가 익어간다. 빨래를 널면서 하늘 한번 쳐다보고 세상 한번 쳐다본다. 바람의 흐름도 느껴보고 빨래마다 가족의 체취도 느껴본다. 옷깃과 소매는 살짝 잡아당겨 구김을 풀고 팍팍 털어 널고 나면 마음마저 상쾌하다.

오늘따라 빨래가 마를 때 나는 냄새가 더욱 좋다. 빨래를 널면 마음도 느슨하고 편안해진다. 스트레스도 빨래처럼 씻겨내려 준다. 이 작은 베란다에서도 자연이 내어준 한 줌 바람과 햇살에 삶의 떼를 말릴 수 있으니 참 좋다. 마음도 세탁하여 넌 듯 세상이 다 시원하다. 살랑거리는 빨래 사이로 언 듯 언 듯 앞집 풍경이 보인다. 마당 같은 골목길에서 지나가는 이웃들의 이야기가 풍경소리처럼 들린다. 익숙한 이웃의 다정한 소리다.

때마침 한라산에는 첫서리가 내렸다고 뉴스에서 알린다. 이제 옷장도 본격적으로 철 갈이를 해야 할 때다. 내친김에 간절기 가벼운 옷들은 깊숙이 들여놓고, 긴 겨울나기를 준비했다. 사계절이 있기에 옷장 갈이도 철따라 바지런해야 할 수 있다. 계절이 지나가는 옷장에는 어느새 두꺼운 겨울옷이 차곡차곡 걸린다. 돗자리도 창고 방으로 돌돌 말려 들어가고 대신 카펫이 거실에 자리 잡았다.

도톰한 카펫에 앉아 베란다에 널려있는 빨래를 보니, 제할 일을 다 못한 건조기가 마음 쓰인다. 고가의 건조기를 장식품으로 둘 수는 없고, 고심 끝에 결정했다. 습한 장마철과 손이 시린 한겨울에는 건조기를 사용하자.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한자락 남은 가을볕에 빨래는 흔들리며 노릇노릇 익어가고, 향기는 코끝을 스친다. 내 삶의 시간도 느릿하니 익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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