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 굽은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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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숙 수필가

차를 타고 달리다 갓길에 멈췄다. 나를 세운 건 허리가 자로 굽은 한 그루의 팽나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팽나무를 무심히 지나치지 못하고 곁을 서성거리는 습관이 생겼다. 노란 유채밭 언덕배기에 오도카니 선 채 산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인 나무. 바람에 머리칼 날리듯 나울거리는 가지도 모조리 산을 향했다. 아직 덜 자란 소년이나 섬 것이라 벌써 풍상을 겪고 있다는 듯 나무는 온몸으로 증거한다.

타지를 돌며 유명하다는 나무와 숲을 여럿 만났다. 그들은 한결같이 활개를 뻗었고, 고개를 한참 젖히고 봐야 할 만큼 아득했다. 그 모습에 탄성을 질렀지만 그때뿐이었다. 프레임이 턱없이 작아 기껏 담아온 것들은 몸통도 가지도 따로였고, 전체 샷은 거리가 먼 탓에 첫 만남의 감동은 일지 않았다. 그때마다 제주의 나무들이 떠올라 팽나무 사진을 뒤적였다. 그들은 동기간처럼 혹은 옛동무처럼 항시 그리운 존재다.

고향에 올 때마다 팽나무를 만나러 휘돌 때가 있었다. 부러 혹은 지나는 길에 이곳저곳으로 차 머리를 돌렸다. 나무들은 고스란히 세월을 새긴 몸으로 나를 맞았다. 산간의 나무는 산간스럽고 바닷가의 나무는 바다스럽고. 어린나무들은 수십의 어른 나무를, 수십의 어른 나무는 수백 연세의 할아버지 나무를 닮아가는 중이었다. 구부렸던 몸을 곧추세울 여지도 없이 다시 바람이 부는 섬. 섬에선 나무들조차 사람을 닮았다. 살아내느라 허리가 굽고 등목이 굽었던 제주인을.

고향 초입에도 등목이 굽은 팽나무가 있다. 그늘의 역할도 없이 그저 동네 어귀 까마귀 동산에 무심하게 섰다. 집이라곤 마을창고밖에 없고 까마귀만 모여드는 스산하고도 드센 바람이 지나는 자리였다. 심히 기운 몸에 몽그라진 가지는 죄다 남쪽을 향했다. 대여섯 살 무렵 처음 보았을 때나 오십여 년이 지난 지금이나 그 모습은 한결같다. 변함없는 모습이 반가우면서도 곁을 지나는 내 몸이 그처럼 비스듬히 기우는 느낌이 들어 마음이 편치 않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얼마간을 까마귀 동산마을창고에서 보냈다. 지금은 아이가 없어 학교를 없앴으나 그때는 아이들이 넘쳐 교실이 모자랐다. 등교하자마자 한쪽으로 몰려있는 책상을 수업 대열로 정리하고, 수업이 끝나면 다시 책상을 한구석으로 몰아놓았다. 그게 더부살이의 규칙이었다. 천장 가까이 닿은 북창으론 빛이 들지 않았고 푸르거나 잔뜩 찌푸린, 도화지만 한 하늘이 번갈아 걸렸다. 교실은 어둑했고, 시멘트 바닥엔 쉬는 시간마다 물을 뿌려댄 탓에 노상 물그림자가 얼룩였다. 잡초가 무성한 창고마당에서 보이는 건 한 그루의 팽나무였다. 비루하고 괴이하게 생긴, 도깨비불이 걸린다는 나무다. 어린 우리는 그곳을 떠나 나이를 먹었고, 나무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나이테를 키웠다. 부름켜에서 나온 그의 나이테는 골마다 그곳의 역사를 기록했다. 양지에 모여 재잘대던 아이들을, 농산물을 모아놓고 등급을 매기던 풍경을, 물질을 다녀오던 젖은 머리 어머니가 담임에게 전복을 건네던 모습을 나무는 비스듬히 비켜선 채 바라보았다. 창고가 헐려 감귤선과장으로 바뀐 뒤 귤을 선과 하느라 드나들던 아버지의 걸음에도 귀를 기울였다. 프레임 안 그의 모습만으로도 이런저런 역사가 줄줄이 엮여 나오는 건 늘 그 자리에 그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구름과 파란 하늘과 돌담과 잘 어우러질 줄 아는 멋진 예술가여서 풍상으로 뒤튼 가지에도 가지가 잘린 옹이에도, 바람과 구름과 햇살을 걸 줄 안다. 풍류가 못지않게 팔도 멋지게 뒤틀며 열정에 찬 몸을 흔든다. 그러니 어찌 그를 뭇 나무와 견줄까. 내가 팽나무에게 라 존칭하는 이유다. 그저 그런 나무가 아닌 특별한 이유다.

차창으로 들이치는 바람이 싸늘하다. 바람에 노란 물결이 출렁이고 팽나무가 구붓한 몸을 휘청인다. 저 나무는 어엿한 성목이 될 때까지 이런저런 바람을 얼마나 겪으려나. 게 중 가장 무서운 개발의 바람은 피할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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