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무는 길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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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언, 시인·수필가

벽에 걸린 달력 한 장의 눈빛, 마주치려니 애처롭다. 보내고 맞는 건 우리의 일상이지만, 난 아직도 서툴러 별리는 늘 맘을 엔다. 그리고 사위는 한 해는 내게 덧없다는 말을 건넨다. 한 일 별로 없이 시간만 흘려보낸 아쉬움에서 비롯되는지 모르겠다.

보릿고개를 넘던 시절엔 부족한 것뿐이어서 미래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긴 세월 참고 견디는 것, 그게 삶의 줄거리였다. 사노라니 입에 풀칠은 면했지만, 이따금 듣는 ‘어르신’이란 호칭이 서글프다. 걸핏하면 병원행이니 오늘이 내일보다 좋은 날이라고 주문 외듯 한다. 아침에 깨면 살아 있나 확인하며 감사하게 된다.

마당의 먼나무 한 그루, 절정의 옷을 입었다. 빨간 열매들을 앙증맞게 매달아 허공을 밝힌다. 결실의 흐뭇한 미소가 곁들었다. 이와는 달리 배롱나무와 공작단풍 나무는 잎을 모두 떨구고 동안거에 든 모습이다. 혹한으로 마음을 씻고 더 맑아지려는 심산일까. 낙엽수를 바라보노라면 인생의 목적은 무한한 성장이 아니라 끝없는 성숙이란 말이 떠오른다.

세상엔 마음의 자로 재야 하는 추상적인 것들이 많다. 같은 걸 달리 보는 눈이며 새로운 의미의 싹이다. 힘들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힘들고 견딜 만하다 하면 견딜 수 있는 게 삶이 아닐까. 그래서 행과 불행은 낱장의 양면 같은 거라 여기며 기울기를 바로잡는다. 누구의 눈엔 불행이지만 누구의 눈엔 행복한 사람, 그게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몇 년 만에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영명축일을 축하하는 내용이었다. 반가웠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게 인지상정이어서 잊은 듯 지내 온 게 미안했다. 하기야 문득문득 떠오르는 얼굴들이 왜 없을까만 안부 한마디 전하지 못하니 알 수 없는 일이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로 변명하는 것도 부끄럽다.

행복 천재들은 모든 날을 비범하게 만든다고 한다. 뜻밖의 날에 뜻밖의 선물을 하여 받는 사람을 영웅으로 만든다니 대단한 삶이다. 이유는 ‘그냥’이라니 순수하게 피어난 관계의 꽃이 눈부시지 않으랴. 이래서 자신도 영웅이 되는 것을.

13세기 터키의 현자로 일컬어지는 나스레딘은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고 한다. 그중에서 권력의 불나방들이 필독하길 바라는 이야기다. 폭군 티무르가 도시에 들끓는 거지들을 소탕하려고 나스레딘에게 명단을 작성토록 했다. 그러자 나스레딘은 서슴지 않고 맨 위에 큰 글씨로 ‘티무르’라고 썼다. 이유를 묻자 나스레딘이 대답한다.

“남의 것 내놓으라 하는 건 똑같지 않습니까? 거지들은 따라다니며 애원하는 반면, 티무르는 안 주면 죽인다고 위협하는 게 다를 뿐이지요.”

내년엔 대선과 지방선거가 치러진다. 진부한 말이지만 최선이 없으면 차선을 택해서 더 나은 사회와 국가로 나아가길 고대한다. 선동의 책략은 진실을 이길 수 없다. 분별력을 발휘하여 양심의 손으로 꾹 누르리라 믿는다.

12월은 한 해를 갈무리하고 새해를 설계하는 달이다. 내겐 거둬들인 게 없어서 빈 곳간이지만 살아낸 자체가 평작이 아니냐고 위로해 본다. 내년에는 이에 더하여 결과물 하나라도 내놓고 싶다. 계획은 이루지 못해도 이정표가 된다. 풀꽃 같은 소박한 꿈이라도 담아 놓으면 아름다운 길이 될 테다. 꿈꾸지 않는 가슴에 별이 뜰 순 없다.

하루를 보내며 조용히 웃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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