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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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봉, 수필가·시인

머리 허연 노부부가 걸어간다. 다정히 맞잡은 손, 느린 걸음에서 서로 맞춰 걷는 배려의 마음이 묻어난다. 두 분을 보니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떠오른다.

할머니가 우리 집안 분이다. 촌수를 따지면 12촌이 된다. 설 때면 빼먹지 않고 과세를 다녀왔다. 적적한지 두 분은 날 보면 기다렸다는 듯이 반겨 주셨다. 그 마을을 지나갈 때면 부러 인사드리러 대문을 들어서기도 했다.

할아버진 구학문을 하신 분이다. 한문에 해박하셨기에 박식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마을 이장도 여러 번 지내셨다. 동네에 아이가 태어나면 이름도 지어 주며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하루는 할아버지께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인지 질문을 던졌다. 서슴지 않고 답을 주셨다.

“네 할머니다. 날 하늘처럼 생각해 주기에 작은 덕이나마 쌓을 수 있었다. 내조가 뭔지를 보여준 사람이다. 산수를 지난 이때까지 한 번도 내 끼니를 잊은 적이 없다. 마실을 갔어도 때가 되면 어김없이 돌아왔다. 그러지 말고 편히 다니라 해도 존경하고 사랑하는 낭군께 내 할 일 즐겁게 하는 거라며. 우리의 다투는 목소리가 울담을 넘어 본 적이 없다. 할머니가 늘 물러서더구나. 동네 아낙들에게 진정으로 사랑과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면 부부싸움이란 있을 수 없고 어떤 역경도 이겨낼 수 있다는 말로 이끌며 존경받아 왔다. 그런 할머니를 존경하지 않으면 난 나쁜 사람이잖으냐. 할머니를 위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밖에서 맛난 것을 먹게 되면 할머니가 좋아하는 먹을 것을 사 들고 들어왔다. 내가 지켜주어야 할 사람이니까. 너도 그리 살거라.”

할아버지 말씀이 내 안으로 들어 가슴 가득 차고 넘친다. 자녀분들도 마을에서 알아주는 인재에다 효자인 건 두 분의 바른생활 덕분일 것이다.

집안일은 할아버지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족보를 만들 때도 할아버지가 계셨기에 쉽게 만들 수 있었다.

늘그막엔 그렇게 존경받으며 살고 싶어 노력한다지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늙은이가 넘치는 고령사회다. 젊은이들에게 흉보이지만 않아도 다행이다. 옛날처럼 노인이 공경받고 젊은이들이 따르는 사회가 바람직하건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공경받으려면 배려도 중요하고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 책을 멀리하지 말고 좋은 인성도 갖춰야 한다. 모범이 되어야 하건만, 우리 주변엔 그런 노인이 많지 않다. 놀고 즐기려는 사람이 많아 보인다.

제주도는 이미 수많은 마을이 초고령사회로 접어들었다. 요양 시설도 부족해 들어가려면 해를 넘겨 기다려야 한다. 선거 때면 정치인들은 노인 복지를 외치며 선심성 지원을 공약한다. 많아진 노인층의 표심을 잡기 위한 선거전이다. 결국은 젊은이들에게 짐을 지우며 노인이 미움받는 사회를 만들고 있다.

노인 세대는 절약하며 열심히 살아왔다. 자식에게 조금이라도 더 남겨주려고 먹고 싶은 것도 참아가며. 그런데 요즘은 그리 살았던 사람보다 허송세월한 사람이 은근히 득을 보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젊은이들도 열심히 일하기보다는 적당히 일하고 분별없이 소비하는 데만 관심이 크다.

열심히 일하고 절약하며 산 사람이 우대받고 공경받는 세상을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 후대에 빚을 지운 노인으로 만들지 말았으면 좋겠다. 퍼주기 보다는 탄탄한 나라곳간을 가진 안정된 나라를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 은퇴한 정치인들이 존경받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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