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경술국치 수모에 임금 흔적 지키려 항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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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방열, 일제의 정의현 객사 전패 철거에 반발하다가 형독으로 순국
 오병윤, 1918년 무오 법정사 항일 운동 참여…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오병표, 한학 닦으며 일제 제도 수용 거부…종교 항일 활동으로 옥고
 오봉조, 성산읍 출신으로 최고 훈장으로 칭송…정의서당 발문 지어
 오사수, 추자도 어민 항일 운동으로 검거돼 1926년 유죄 판결 받아
정의향교가 있는 성읍민속마을의 1970년대 모습. 오방열은 일제의 사주를 받은 정의군수가 정의향교에 봉안된 ‘정의현 객사 전패’를 철거하려고 하자 유림들을 모아 항거했다. 유림들은 오방열의 뜻을 받들어 향교 근처에 있는 의사묘로 전패를 옮겼다.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정의향교가 있는 성읍민속마을의 1970년대 모습. 오방열은 일제의 사주를 받은 정의군수가 정의향교에 봉안된 ‘정의현 객사 전패’를 철거하려고 하자 유림들을 모아 항거했다. 유림들은 오방열의 뜻을 받들어 향교 근처에 있는 의사묘로 전패를 옮겼다.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오방열吳邦烈:1851(철종2)~1914(일제강점기), 문인, 서당 훈장, 자 태강(泰康). 호 경암(敬庵). 정의향교의 재임(齋任), 본관 군위.

성산읍 신풍리(웃-내끼)에서 오진조(吳眞祚)의 큰아들로 태어나 1874년(고종11)에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이 귀양살이 왔을 때 의청(毅淸) 오진조(吳眞祚·오방열 부친)의 주선으로 정의현 고을 안의 선비들과 같이 배움을 청했다.

1912년 일본인 관리가 전패를 철거하려 하자 오방열이 다시 성토하니 당국에 체포돼 심한 형독으로 겨우 한 해를 넘겨 사망했다. 사림장(士林葬)으로 장례를 치렀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당시 정의군수가 일제의 사주에 의해 향교의 전패(국왕의 상징물)를 철거해 외부에 묻어버리려고 했다. 이에 오방열은 서통유사(書筒有司) 김신황(金愼璜)을 시켜 정의현 관내 4개 면의 유림들을 모이게 한 후 결사 항거하게 했다.

그 후 오방열의 뜻을 받들어 유림들은 정의향교 가까이에 있는 의사묘(義士廟)로 새롭게 전패를 옮겨 모셨다. 이러한 사실을 남원면 태흥리의 선비 우석(友石) 김희은(金熙殷)이 광복 후에 ‘정의향교 대성전 전패봉안기’에 기록해 전해진다.

기(記)의 내용은 ‘정의향교에 갔으나 명륜당을 중수하려고 해체되어 직접 목격하지 못했으나 대동문헌보감(大東文獻寶鑑)에 등재된 기문(記文)을 읽을 수 있었다. 국치(國恥) 다다음해인 임자년에 고을의 아전과 사령의 무리들을 보내어 객사를 훼철하려 함으로 성안의 유생을 모아 전패를 의사묘(義士廟)에 임시 옮겨 모시니 일본 관리가 오방열을 체포하여 형을 가하며 꾸짖으니 방열이 소리를 가다듬어 대답하기를 ‘황제 폐하께서 지금 계신데 어찌 옛 나라를 잊고 전패를 매안(埋安)하겠느냐!’ 하니 일본 관리가 크게 노하여 형벌을 더했다. 이런 구절에 감명을 컸다고 적혀져 있었다.’

그의 유고는 5권이나 있었는데 1948년 무자년 난리에 거의 일실되고 절구 137수만이 남아 백규상(白圭尙)이 번역으로 2003년 도서출판 제주문화에서 펴낸 ‘三吳文集’이 발간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한학자 오문복(吳文福)의 증조.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36호 정의현 객사 전패. 제주일보 자료사진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36호 정의현 객사 전패. <제주일보 자료사진>

▲오병윤吳秉允:1895(고종32)~?, 무오년 법정사 항일 운동.

그는 중문면 도순리(돌-숭이)에서 태어나 1918년 10월 5일 그는 66명과 함께 체포됐다. 1919년 2월 4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33년 3월 일본공산당에 입당, 오사카 동지구 소속으로 활동하던 중 동년 7월 당국에 체포된 이후의 소식은 두절됐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오병표吳秉杓:1867(고종4)~1948(미군정기), 무극대도교의 항일 활동, 본관 군위, 오진숙(吳晋淑)의 아들.

아라리(아라위)에서 태어나 보천교를 믿었다.

1936년 음력 11월경 김경식(金景軾, 영평)의 권유로 무극대도교를 믿어 핵심 신도로서 활약했다.

1938년 12월 13일 체포돼 취조 끝에 21명을 기소, 그는 1940년 12월 4일 광주지법에서 징역 2년 6월을 선고하자 옥고를 치렀다.

제주시 아라동(아라위) ‘대원(大垣)-마을’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부형의 뜻을 따라 구학문을 닦으며 자정(自靖)해서 일제강점기의 제도에 타협하지 아니했다.

귤당(橘堂)의 아들인 관해(觀海) 이응호(李膺鎬)와 교유가 깊어 많은 문자를 교환했다.

※오병표의 시=追賀文淵社建立後 문연사 건립을 축하하며, 淵上峰高瞻聖前:연미촌 위쪽 우뚝 솟은 첨성봉 앞에/設壇報德是文淵:문연사 단을 쌓아 어진 이를 추모하니/一天魚鳥共歡樂:이 세상 새와 고기들까지 다 기뻐하며/但願亨儀多歷年:오래도록 변함없이 이 제향이 받들어지기를

▲오봉조吳鳳祚:1730(영조6)~1815(순조15), 문사, 정의서당 훈장, 호는 항인(巷人), 본관은 군위.

성산읍 오조리(오졸-개)에서 아버지 오후찰(吳厚札)과 어머니 김해김씨의 아들로 태어나 정의서당(旌義書堂)의 훈장을 지냈다.

문하생으로는 정의현의 유종(儒宗)이라 할 수 있는 전 현감 강성익(康聖翊·1748~1820, 삼달), 전 현감 고명학(高鳴鶴·1769~1836, 상효), 전 현감 부종인(夫宗仁·1767~1817, 토평) 등이었다.

세칭 ‘오조리(오졸-개)의 오훈장’ 하면 당시 최고의 훈장으로 지칭됐으며 유고로 ‘흥학문’이 있으며 ‘정의서당 발문’을 지었다.

※오봉조의 시=敬次烏川洪孝子贊 오천이 홍효자를 찬양한 시에 부쳐, 千古卓然不朽名:오래도록 탁연해 잊지 못할 그 이름이여/忠孝雙全日星幷:충화 효를 함께 닦아 해와 별 같이 빛이 나네/三年燃燭瞻宸淚:3년 동안 촛불 밝혀 북쪽 궁궐 우러러 눈물 흘렸고/六載居廬泣血情:6년 동안 시묘하여 정성이 눈물겹네!/人竪口碑揚實蹟:행적을 찬양하는 말 대대로 전해 오고/天褒旌楔樹風聲:나라에서 정려 세워 그 명성을 표창했네!/餘慶有子循遺矩:후손이 대를 이어 그 가풍을 따르니/逖矣耽羅義理明:먼 지방 탐라 섬에 의리가 밝혀졌도다.

▲오사수吳士秀:1892(고종29)~?, 추자도 어민의 항일 활동, 추자면 신도(身島)의 예초리(여초)에서 태어났다.

추자도 어민 항일 활동으로 연행된 21명 가운데 한 명으로 1926년 7월 20일 광주지법 제주지청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1926년 조합장 김상진(金相鎭)은 일제 당국과 결탁, 1923년 면장 원용배의 후임으로 김승배(金承培)를 새로 임명했다.

그러나 어업 조합에 대한 도민의 분노와 비난이 컸다. 예초리 남녀 700여 명은 극도로 흥분, 김상진을 응징하고 구호를 외치며 당국에 대해 항의시위를 전개했다.

이 일이 제주에 알려져 급보를 접한 제주 기자단에서는 홍순일(洪淳日)과 윤석원(尹錫沅) 두 기자를 급파, 진상을 철저히 조사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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