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 마을을 지키는 바위…현자의 정기 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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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앞막은골·유반석 전설
골짜기 앞막은골 기암괴석에 담긴 슬픈 사랑 이야기
유반석에는 동·서 마을 세력 다툼 관련 전설 내려와
창천·화순 지석묘서 선사시대 토기·성혈 발견하기도
유반석에는 문반들이 살던 동동네와 무반들이 살던 섯동네 마을에 관한 전설이 내려온다. 사진은 설화 속의 유반석으로 그때의 받침돌이 지금도 남아 있어 설화가 사실인양 전해지고 있다.
유반석에는 문반들이 살던 동동네와 무반들이 살던 섯동네 마을에 관한 전설이 내려온다. 사진은 설화 속의 유반석으로 그때의 받침돌이 지금도 남아 있어 설화가 사실인양 전해지고 있다.

▲청정계곡 앞막은골 전설

월라봉 동쪽 마을 대평포구 위에는 앞막은골이라 불리는 골짜기가 숨어있다. 이곳에는 기암괴석과 왕대들이 하늘을 가리는 보기 드문 곳도 있다. 대나무 숲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소리 새소리를 들으며 숨어있는 돌계단을 오르면 커다란 바위 틈 사이에 있는 자그마한 굴도 만난다. 이곳이 기암에 막혀 더 나아갈 수 없다는 막은굴이다.

막은굴 아래 폭포수와 계곡물이 만나는 지점에도 자그마한 굴이 또 하나 있다. 이곳 안마긍굴은 막은굴 안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제주어 이름이다. 자그마한 폭포 뒤로는 웅장한 바위가 막아서 있다. 폭포에 눈물을 흘리듯 서 있는 기암은 가녀린 여자 형상이다. 그리고 막은골 초입에 바다를 감시하듯 서있는 기암은 속세를 떠난 남자를 닮았다.

오래전 이 고을에 대식이란 총각과 평순이란 처녀가 살고 있었다. 어릴적부터 사랑하는 사이였으나, 대식이가 불가에 귀의하자 평순이는 사랑하는 대식이를 멀리서 바라보다 돌이 되었다고 전한다. 대식이가 돌이 되어 서 있는 곳에는 선기암(仙起岩)이란 바위가 있고, 바위에는 다음의 한시가 적혀 있다.

‘낙엽이 떨어지기 전에 티끌이 일어나면/ 그 티끌이 다 낙엽이 되도다. / 낙엽이 떨어진 후에는/ 하늘에서 먹구름이 울도다.’

기암괴석에 대한 다른 이야기도 전해 온다. 불로초를 구하러 진시황이 보낸 동남동녀 500쌍 중 한 쌍이 이곳 풍광에 매료되어 앞막은골로 숨어들었다. 박수기정에 부딪히는 파도소리와 계곡의 새소리 물소리를 들으며 밀애를 즐기던 그들에게 황제가 보낸 저승사자가 바닷길로 나타나자, 둘은 사랑의 맹세를 죽음으로 보이기로 했다. 순결한 사랑에 감동한 한라산신이 그들을 한 쌍의 기암괴석으로 이곳에 발현케 했다고 전한다.

앞막은골 기암괴석.
앞막은골 기암괴석.

▲월라봉 명품바위 유반석 관련 설화

오래전 월라봉 서쪽 마을은 동동네와 섯동네로 나누어져 있었다. 유반석(儒班石)이 서있는 동동네에는 양반인 문반들이 살았고, 무반석(武班石)이 서 있던 섯동네에는 힘이 쎈 무반들이 살았다. 동동네 사람들은 학식이 높고 지혜가 있으나, 섯동네 사람들은 학식이나 지혜가 모자란 대신 힘이 장사였다.

당시는 힘이 센 무반의 세상이었다. 학식 높은 동동네 사람들이 섯동네 사람들에게 주눅들며 지내던 어느 해 어느날 밤, 현자인 나그네가 동동네에 들어와 거닐다, 동쪽과 서쪽에서 나오는 불빛을 보았다. 서쪽 무반석의 불빛은 횃불 같으나 동쪽 유반석의 불빛은 반딧불 같았다.

현자와 함께 불빛의 차이를 본 문반들은 그제야 유반과 무반의 정기가 어디서 오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이에 유반들은 역발상의 지혜를 내어 섯동네 무반석을 허물자고 의견을 모았다.

어느날 동네 어르신이 돌아가자, 동동네 섯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어 장례를 치른 후 술자리가 마련되었다. 동동네 유반들은 섯동네 무반들에게 술을 권하며, 힘이 센 무반들을 칭찬하는 척했다. 기분이 좋아진 무반들은 술이 술술 들어가고 거나하게 취해갔다.

그러자 동동네 사람들은 도저히 흔들 수 없는 무반석을 섯동네 사람들은 할 수 있을 거라고 부추겼다. 이에 섯동네 사람들은 무반석으로 가서는 제각기 힘자랑을 해대더니, 이내 무반석은 무너졌다.

순간 무반석이 있던 곳에서 청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그리고 이튿날부터 섯동네에서는 힘자랑을 하며 무반석을 밀친 사람들이 하나둘 병들거나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때야 유반의 꾐에 속은 것을 안 무반들은 유반석 아래에 받침돌도 넣곤 무너뜨리려 밀고 또 밀었다.

그러나 정기를 잃은 무반들은 끝내 유반석 바위를 넘어뜨릴 수가 없었다. 세월은 흘러 동동네와 섯동네 사람들은 무반석과 유반석의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사돈을 맺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유반석 바위 아래에는 그때의 받침돌이 지금도 남아있어, 당시의 일이 사실인양 전하고 있다.

위석식 지석묘인 창천 지석묘 1호. 저 멀리 군산 정상이 보인다.
위석식 지석묘인 창천 지석묘 1호. 저 멀리 군산 정상이 보인다.

▲월라봉 주변 마을에 있는 고인돌과 성혈

월라봉 주변에서는 창천 지석묘와 화순 지석묘 2기를 볼 수 있다. 아주 오래전 선사인들은 월라봉에서 사냥을 하다 만나기도, 영역 싸움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다 부족의 우두머리가 죽으면 족장의 무덤인 지석묘도 만들었을 것이다.

고인돌이 대평리에 있으면서도 창천이라는 이름으로 지정된 것은 기념물 지정 당시의 고인돌 지번이 창천리의 구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제주도기념물 제2-24호인 창천 지석묘 1호는 위석식 지석묘이다. 위석식 지석묘란 덮개돌 아래에 병풍처럼 여러 고임돌(기둥돌)로 받친 형태를 말한다.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해안에서 300여 미터 떨어진 이곳에서는 기원 전후 시기에 해당하는 적갈색 토기편이 여러 점 발견되었다고 한다.

화순리 710-1번지에 위치한 화순 지석묘 1호는 기원 전후 3세기경에 구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순리유물산포지구인 이곳 주변은 기원 전후 2세기경의 탐라형성기에 해당하는 움집 등 주거 유적들이 있었던 곳이다.

화순리 지석묘 뚜껑돌 윗면에는 11개의 성혈이 있다. 뚜껑돌 아래에는 정교하게 다듬어진 판석형 지석이 받치고 있다. 비지정 지방문화재인 화순리 지석묘는 개인 소유지에 있어 찾아가기가 힘든 편이다.

지석묘가 있는 밭 주인에 의하면, 논밭에 묻혀 있던 지석묘 위에는 팽나무 등이 자라고 있었고, 1960년대 동네 아이들이 지석묘 위에서 공기놀이도 했었고, 2010년 당시 논밭이던 이곳에 비닐하우스를 설치하려 주변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지석묘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고인돌 위쪽에 파인 홈이 성혈(구멍바위)이다. 거석숭배문화의 흔적인 성혈은 별자리를 나타내기도, 불씨를 만드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묻힌 사람인 피장자의 등급과 서열 또는 피장자의 가족 수를 나타내기도, 특히 제주에서는 칠성신앙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제주도는 북두칠성 신앙의 근간을 이루던 별나라였다. 칠성단을 쌓아 별에 제사를 지냈던 탐라국에서는 왕의 호칭도 성주(星主)이고, 도성의 호칭도 칠성고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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