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 인기만큼 파란만장한 삶 살다간 70년대 대표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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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섬, 1623년 10월 시관서 혼자 급제…상의원정·강원도감사 등 지내
 오성찬, 소설 ‘별을 따는 사람들’로 등단…제주신문·제남일보 기자
 오수미, 남편 납북·동생 실종으로 방황…하와이서 교통사고로 사망
 오승언, 종교 항일 운동…1940년 징역 2년 6월 선고받고 옥고 치러
 오승현, 1854년 별시에서 문과에 합격…병조좌랑·보안찰방 등 역임
주명덕 사진작가가 촬영한 배우 오수미. 제주시 건입동 출신인 오수미는 1970년대 인기 배우로 활약하다 하와이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연합뉴스
주명덕 사진작가가 촬영한 배우 오수미. 제주시 건입동 출신인 오수미는 1970년대 인기 배우로 활약하다 하와이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연합뉴스>

▲오섬吳暹:1585(선조18)~?, 문신, 강원도감사, 자 퇴이(退而), 본관 군위.

제주시 아라동(아라위)에서 효자 오몽열(吳夢說)의 아들로 태어나 1618년(광해군10) 사마시에 급제했다.

1623년(인조1)에 인조반정이 성사, 동년 9월 제주시재어사 최진운(崔振雲)이 제주에서 병사, 동년 10월 시관(試官)이 시취하니 진사 오섬이 혼자 급제했다. 이에 오섬은 총리영(摠理營)의 척후장(斥候將)으로 임명받아 적병(賊兵)을 무찔러 벼슬이 오를 뻔했으나 만년에는 전북 부안현(扶安縣)으로 이주해 살다가 변산반도의 석포촌(石浦村)에 묻혔다.

1624년(인조2) 증광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 6품직을 서임(叙任) 받았다. 마침 이듬해 평안병사(平安兵使) 이괄(李适·전 제주목사)이 귀성부사(龜城府使) 한명련(韓明璉)과 더불어 반군을 이끌고 대궐을 침범했다. 나라에서는 도원수 장만(張晩)에게 명해 이를 평정하게 했다.

춘추관수찬·상의원정 등을 거쳤으며 늦게 강원도감사를 지냈다.

▲오성찬吳成贊:1940(일제강점기)~2007, 소설가, 제주의 언론인, 본관 군위, 서귀포시 서호西好<호근-머들> 출신, 1952년 서호초등학교 졸업, 1967년 제주신문 편집부장.

1969년 신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별을 따려는 사람들’이 당선됐다. 1978년에는 제주도문화상을 수상했다.

제남신문의 폐간으로 편집부장 오성찬 등 10명이 해직되었다.

민속자연사박물관 민속연구관, 예총(藝總) 제주도지회장을 역임했다.

1983년 도의문화 저작상(著作賞), 1992년 요산문학상과 한국소설문학상을 수상했다.

부인 이향자와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다. 1984년 10월 ‘월간 관광제주’는 편집국장 홍명표(洪明杓)와 편집장 오성찬으로 하여 발행하다가 1992년 2월 ‘월간 문화제주’로 개제(改題)하였다.

 

 

배우 오수미의 시신이 안장된 제주시 황사평 천주교 묘역.
배우 오수미의 시신이 안장된 제주시 황사평 천주교 묘역. <연합뉴스>

▲오수미吳樹美:1950(분단시대)~1992, 영화 여배우, 본명은 윤영희(尹英嬉), 영화감독 신상옥(申相玉)의 부인.

제주시 건입동(건들-개)에서 태어나 신성여고를 졸업했다.

1973년 영화 ‘이별’의 프랑스 로케 때에 신상옥(申相玉) 감독과 결국 부부가 됐다.

신(申)감독과의 사이에 아들 상균, 딸 승리를 둔 그녀는 1992년 6월 30일 하와이에서 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한 비운의 스타였다.

1978년 신상옥이 납북(拉北)되면서 프랑스 교포 사진작가 김중만(金重晩)과 다시 결혼하였다. 이로써 프랑스 국적을 갖게 됐으나 1986년 3월 신상옥과 최은희(崔恩姬) 두 사람이 북한을 극적으로 탈출하자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을 감당하지 못해 김중만과도 헤어졌다.

80년대 말 대마초 흡연사건에 휘말리는 등 정신적인 방황을 거듭하기도 했다.

이후 두 자녀를 신상옥, 최은희 부부 슬하에 입적시키고 독신으로 지내왔다.

오수미는 하와이에서 친구 부부와 함께 승합차를 타고 가다가 브레이크 파열로 낭떠러지로 추락, 그 자리에서 숨졌다.

죽음이 6일이나 지나 알려지게 된 것은 오수미의 신상이 현지 경찰에 의해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42년에 걸친 우여곡절 인생은 어느 슬픈 영화보다 비극적이어서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안타깝게 했다.

국내의 영화배우협회(회장 남궁원·南宮遠)도 임원을 파견, 시신은 서울로 운구(運柩)돼 영화배우 협회장(協會葬)으로 치렀으며 제주도 황사평(黃蛇坪)의 천주교 묘역에 안장됐다.

지난 70년대 한때 인기를 누리기도 했으나 신상옥 감독의 납북, 유명 모델이던 동생 윤영실(尹英實)의 실종, 대마초사건 등으로 잇따라 시련을 겪은 비운의 스타였다.

▲오승언吳承彦:1887(고종24)~1946(미군정기), 무극대도교의 항일 활동, 본관 군위.

오동현(吳東顯)의 아들로 표선면 가시리(가스름)에서 태어나 보천교를 믿었다.

1936년 5월경 강승태(姜昇泰·46·하예)의 권유로 무극대도교(無極大道敎)를 믿게 돼 1938년 12월 13일 신도 다수를 체포하고 취조 끝에 21명을 기소하는데 그는 1940년 12월 4일 광주지법에서 소위 불경죄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오승현吳承鉉:1807(순조7)~1864(고종1), 문신, 병조좌랑, 자 자경(子卿), 본관 군위.

오영규(吳暎奎)의 아들로 서귀면 토평(돚-드르)에서 태어났다.

춘추관기사관이 되어 재임 중 1864년 7월 23일 사망하자 반장(返葬)했다.

1854년(철종5) 영상 김좌근(金佐根)이 섬의 유생들에게 별시(別試)를 실시하도록 하니 예랑(禮郞) 김관섭(金觀燮)이 시제(試題) ‘이궐포귤유부(以厥包橘柚賦)’를 지참하고 내도했다.

제주 문무별시를 실시해 문과에서 갑과로 김명악(金命岳·납읍), 을과로 오승현, 병과로 박수룡朴秀龍(곽지) 등이 급제되고 무과에서 갑과로 이언길(李彦吉), 을과로 고원석(高元錫), 정석구(鄭錫龜), 고재언(高才彦), 병과로 고한룡, 홍원집(洪元集), 고용근(高龍謹), 김명임(金命任), 김재윤(金才允) 등이 급제했다.

동년 8월 8일 사화(賜花)·홍패·홍방목(紅榜目) 등이 내려와 8월 16일 잔치가 벌어져 급제자를 차례로 불러 어사·홍패·홍방목과 교지를 내리자 섬 안의 선비들이 기뻐 춤을 추면서 임금의 은혜에 고마워했다.

1857년 4월 사헌부장령, 동년 9월에 사간원정언, 1858년 병조좌랑, 1864년 강원도 원주의 보안찰방(保安察訪)으로 제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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