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경 품은 하천…보물 간직한 ‘창고’로 불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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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화순리 선사유적지·창고천
방어 쉽고 대외교류 유리한 화순리에 선사시대 마을 조성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창고천…임관주 마애명 있어
임관주 시에 등장한 창고천 풍경. 1767년 임관주는 중앙과 지방 관원들의 비리, 무장들의 권위 존중 등 10여 가지에 달하는 조목을 비판하는 상소로 서귀포시 안덕면 창천리에 유배됐다. 신하들의 건의로 해금된 임관주는 창고천 등 제주의 여러 명소를 찾아 시를 짓기도 했다.
임관주 시에 등장한 창고천 풍경. 1767년 임관주는 중앙과 지방 관원들의 비리, 무장들의 권위 존중 등 10여 가지에 달하는 조목을 비판하는 상소로 서귀포시 안덕면 창천리에 유배됐다. 신하들의 건의로 해금된 임관주는 창고천 등 제주의 여러 명소를 찾아 시를 짓기도 했다.

▲탐라국 형성기 거점마을 화순리 선사유적

남제주화력발전소 증설 과정에서 발굴된 화순리 선사유적은 기원전후 2세기경 번성했던 마을유적이다. 이곳에서는 움집터, 저장구덩이, 도량시설,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돌무지와 널무덤 등이 확인되었다.

화순리 선사마을이 크게 조성될 수 있었던 것은 외부에서의 공격에 대한 방어가 쉽고, 바다를 통한 대외교류에 유리한 지형 때문일 것이다. 특히 제주에서 생산되지 않는 철기와 옥제품의 반입은 이곳이 거점마을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돌도끼·갈돌·갈판·숫돌과 같은 석기뿐만 아니라, 그릇과 제기와 같은 토기 제품, 옥으로 만든 구슬과 대롱옥 등 장신구들이 출토되었다.

청동기 후기에는 산북 지역인 삼양동·용담동에 큰 마을들이 조성되고, 철기시대를 거치며 산남 지역의 화순리·창천리·예래동·강정동 등의 선사마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화순리 양왕자터에서 엿본 삼성신화

오래전부터 화순리 333번지 일대를 양왕자터라 불리어왔다. 탐라국을 다스린 으뜸벼슬은 성주와 왕자이다. 국왕인 성주(星主)는 별의 주인이란 의미이고, 왕자(王子)는 왕의 아들이 아닌, 탐라국의 두 번째 벼슬 이름이다.

1300년 고려조정은 제주도를 동도와 서도로 나누고, 현으로 귀일·고내·애월·곽지·귀덕·명월·차귀·산방·예래·홍로·호촌·토산·김녕·함덕·신촌 등으로 나눠 대촌현(지금의 제주시) 관할 아래 두었다.

당시의 화순리 지역은 제주의 17현 중 산방현에 속했다. 1968년 발간된 원대정지에는 현동(縣東) 10리에 산방촌이 있다고 기록하고, 감산리 또는 화순리 양왕자터를 그 치소로 추정하고 있다.

탐라국 삼성신화를 다룬 책들인 영주지·고려사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탐라지 등에는 삼신인의 거주 지역인 1도·2도·3도의 위치에 대하여 구체적인 기록이 없는 반면, 1450년 영곡 고득종이 지은 탐라고씨족보 서세문에는 삼성인의 거주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고을나 사는 곳은 한라산 북쪽인 1도리로 지금의 제주땅이고, 양을나 사는 곳은 제2도로 한라산 남쪽 땅인 산방리로 지금의 대정땅이고, 부을나 사는 곳은 제3도로 한라산 왼쪽 땅의 남쪽인 토산리로 지금의 정의땅이다.’ 영주지의 이본(異本)으로 추정되는 장흥고씨가승(家乘)에도 ‘고을나는 제1도이니 한라산 북쪽의 일도리요, 양을나는 제2도이니 한라산 우익의 산방리요, 부을나는 제3도이니 한라산 남쪽의 토산리이며, … 그래서 국호를 둔모(屯牟)라 하였다.’라고 기록되었다.

이로 보아 오래전 산방산 인근지역에 제주왕자인 양씨부족이 유력집단으로 거주했음이 추정된다.

한편으론 중국 운남성 성주인 양왕의 아들 백백태자와 그 일행들이 원나라 패망(1368년) 이후 제주에 들어와 살았던 적소를 양왕자터로 (또는 제주시 삼양동에 있는 원당봉 근처로) 추정하기도 한다.

임관주 시의 마애명을 가리키며 바위가 무너지기 전에 글씨 복원과 안전장치가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안덕면 주민차지위원회 전·현직 위원장들.
임관주 시의 마애명을 가리키며 바위가 무너지기 전에 글씨 복원과 안전장치가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안덕면 주민차지위원회 전·현직 위원장들.

▲창고천과 유배인 임관주의 마애명

1100도로(한라산 제2횡단도로)변 삼형제오름 주변에서 발원한 창고천은, 병악과 안덕계곡을 거쳐 바다에 이르는 22.5㎞ 길이의 하천이다.

18세기에 편찬된 증보 탐라지(增補 耽羅誌)에는 군산과 월라봉을 휘감아 흐르는 창고천은 주변에 소와 바위 등 볼만한 경관들이 많아, 마치 보물을 간직한 창고와 같다고 하여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창고천에는 창고샘과 남당물 등지에서 솟은 물이 사시사철 고이는 가메소와 도고샘 등 커다란 소(沼)도 십여개가 넘는다. 특히 주변이 절경인 양제소는 길이가 80m 폭이 40m, 깊이가 25m가 넘는다.

최근까지도 이곳에서 하류 2㎞ 지점에 있는 논에 물을 대어 벼농사를 짓기도 했다. 창고천은 신증동국여지승람(대정)에는 감산천(甘山川), 해동지도(제주삼현)와 조선지형도에는 창고천(倉庫川), 조선지지자료에는 창천리천(倉川里川)로 표기되어 있다.

문화재 보호구역(천연기념물 제377호)으로 지정될 만큼 절경을 자랑하는 창고천을, 월라봉 주변 마을들인 감산리와 창천리 등지에 유배된 신명규와 신임 부자·임징하·오시복·권진웅 등도 찾아가 시름을 달랬을 것이다.

최근 ㈔질토래비에서는 안덕면 주민자치위원회 전·현직 위원장(이승훈·양재현)의 안내로 창고천 도처를 탐사했다. 특히 진소 주변에 있는 임관주의 마애명과 폭포를 찾았다.

임관주는 1767년(영조 43) 정언으로 재임 중 중앙과 지방 관원들의 비리, 무장들의 권위 존중 등 10여 가지에 달하는 조목을 비판하는 상소로 창천리에 유배되었다. 상소문에는 수탈만 일삼고 수천의 기민을 돌보지 않은 이명운 제주목사를 파직해야 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신하들이 바른말을 하는 관리를 섬에 가둘 수 없다고 임금에게 건의하자, 이내 해금된 임관주는 창고천 등 제주의 여러 명소를 찾아가 시를 짓기도 했다. 다음은 창고천 기암에 새긴 그의 시다.

‘始出荊門日(시출형문일) 처음으로 귀양살이 하던 집을 나서는 날에 /先尋枕下川(선심침하천) 베갯머리 아래 가까이 있는 시냇물을 먼저 찾았네 /蒼巖三曲立(창암삼곡립) 푸른 바위는 세 굽이 물 곁에 둘러 있고 /短瀑晩楓邊(단폭만풍변) 늦가을 단풍가엔 자그마한 폭포가 있네’

▲월라봉과 관련된 장사 구운문(具雲文) 설화

오래전 제주에서는 월라봉 주변 마을에 살았던 화순리 구운문, 창천리 막산이, 사계리 정운디를 제주도의 3장사라고 칭했다. 화순리의 강씨 댁은 해마다 월라봉에서 보리 농사를 지었으나, 야우(野牛:진상소)들이 들어가 보리밭을 망쳐버리곤 했다.

어느날 강씨가 장사 구운문을 찾아가, ‘들소들이 보리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해준다면, 등짐을 질 수 있는 한 보리를 가져가도 좋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구운문은 보리밭을 습격하는 소떼들을 가로막고는 달려드는 소들의 양쪽 뿔을 잡고 월라봉 동쪽 골짜기로 내던졌다.

겁에 질린 소떼들이 출입하지 않는 보리밭에서 많은 수확을 거두게 된 강씨는 구운문에게 보리를 등짐져 가도록 했다.

그러자 구운문은 쇠앗배(밧줄)로 1000여 평의 밭에서 베어낸 보리 절반가량을 한꺼번에 지고 가버렸다.

힘이 세다 한들 얼마나 지고 가랴 하고 호기심으로 지켜보던 강씨댁 사람들은 구운문의 엄청난 힘에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이 밖에도 월라봉 황개창 맹알목소에 사는 맹아리라는 괴물을 퇴치한 이야기 등 구운문 장사에 관한 여러 설화가 전해온다.

※다음 호부터 질토래비는 한경면 고산리 주변 차귀현의 역사문화를 찾아 여정을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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