팥죽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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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업, 전략사업본부장 겸 논설위원

동짓달 긴긴 밤의 한가운데를 베어 내어/ 봄 바람처럼 따뜻한 이불속에 서리서리 넣어 두었다가/ 정든 임이 오신 밤이면 굽이굽이 펼쳐 내어 그 밤이 오래오래 새게 이으리라.” 조선의 대표적인 여류시인이자 명기(名妓)인 황진이가 지은 동짓달 기나긴 밤이란 시조의 구절이다.

긴 동짓달 밤을 활용해 임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아름다운 시어로 표현했다는 평을 받는 명시(名詩). 그래서일까. 해마다 동짓날이 오면 이 시조가 떠오르곤 한다. 오늘(22)이 바로 그날이다. 1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다.

동지(冬至)를 한자로 직역하면 겨울에 이르렀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말 그대로 겨울의 한복판에 와 있다는 얘기다. 결국 동지는 겨울의 중심이자 밤이 최고로 긴 날이다. 이후 동지 다음 날부터는 밤이 짧아지고 낮이 점점 길어지기 시작한다.

과거 농경사회에선 밤을 어두운 음()으로, 낮을 밝은 양()으로 봤다. 이날을 태양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날로 여긴 이유다. 민간에선 동짓날을 설에 버금간다고 하여 아세(亞歲)’ 또는 작은 설이라고 불렀다. 동지를 한 해의 마무리, 새해의 시작으로 인식한 게다.

예부터 동짓날엔 팥죽을 쑤어 먹었다. 시절식(時節食)의 하나이면서 신앙적인 뜻을 지니고 있어서다. 새해 운수가 대통(大通)해 마음먹은 대로 소원을 이루게 되며, 가족들도 잔병치례 없이 평안한 한 해를 보낸다고 믿은 게다. 반대로 팥죽을 먹지 않으면 쉬이 늙고 잔병이 생기며 잡귀가 성행한다는 미신(迷信)도 전해져 온다.

집안 곳곳에 팥죽을 놓거나 벽과 문짝에 팥죽 국물을 뿌리기도 했다. 귀신을 쫓기 위함이다. 팥의 붉은색이 양색(陽色)으로 음귀(陰鬼)를 쫓는 데 효과가 있다는 속신(俗信)에서 나온 풍습이다. 송구영신(送舊迎新)의 의미다.

우리 조상들은 경사가 있거나 재앙이 닥쳤을 때 팥죽, 팥떡 등을 해서 먹곤 했다. 전염병이 유행할 경우 우물에 팥을 넣으면 물이 맑아지고 질병이 없어진다는 속설(俗說)도 신뢰했다. 이런 항설(巷說)은 최근까지 이어져 팥떡으로 고사를 지낸다. 사업이 번창하고, 각종 사고가 없기를 기원하는 거다.

동짓날을 맞지만 분위기는 암울하다. 코로나19의 재확산으로 방역이 강화돼 단계적 일상회복(위드 코로나)이 잠시 중단된 탓이다. 송년 기분이 날리 만무하다. 아무래도 팥죽을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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