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신이 탐라를 지킨 곳…선사인 발자취 고스란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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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고산리 비경·비사
돌화살촉·돌도끼·토기 등 선사시대 유물 10만여 점 출토
차귀도 기암괴석 절경과 수월봉 엉알길 화산 흔적 장관
탐라순력도 차귀점부.
탐라순력도 차귀점부.

◆이번 주부터는 수월봉과 당산봉, 그리고 차귀도와 이웃하고 있는 고산리 지역의 역사문화 발자취를 약 10여 회에 걸쳐 소개한다.

▲비경과 비사가 넘치는 차귀현 고산리

수월봉과 당산봉 그리고 차귀도가 위치한 고산리 지경은 고려시대에는 탐라의 15현 중 차귀현이 있었던 지역이다.

‘차귀’라는 지명은 중국 송나라의 호종단 일행이 탐라의 수맥과 지맥을 끊고 귀향하는 것을 한라산신이 차단하였다는 설화에서 유래한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지질공원이자 화산학의 교과서라 불리는 수월봉과 명품 해안길인 엉알, 분화구를 숨긴 바다와 다양한 볼거리를 품고 있는 차귀도, 우리나라 최초의 신석기 선사인이 살았던 한장밭 평야 등 자연과 인간이 세월 속에서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조화를 이루었던 유적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신비한 곳이다.

선사인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신석기 시대의 토기와 후기 구석기 시대의 돌화살촉과 돌도끼 등 10만여 점의 선사시대 유물들이 출토된 이곳에 선사유물전시관이 들어선 것은 어쩌면 늦은 감이 있다. 이곳은 또한 제주의 아픔이 서린 곳이다. 수월봉 해안에 있는 갱도와 참호는 미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바다로 직접 돌격하는 일본군 자살특공대 보트와 탄약을 보관했던 곳이자 지휘소가 있던 유물이다.

수월봉 바다 건너에 있는 차귀도에는 소래기(매) 동산과 볼래기 동산, 그리고 설문대할망 신화 속 오백장군의 막내바위도 있다.

코끼리 바위, 병풍바위 등의 기암괴석들은 보는 사람에 따라 보는 위치에 따라 모습이 다채롭게 나타나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수월봉 동쪽에 위치한 당산봉(차귀악)에는 제주도 3대 국당이라 알려진 차귀당과 제주의 25개 봉수대의 하나인 당산봉수대가 있었다.

옛 차귀현 중심 마을인 고산리 가름(중심지)에는 제주도 방어망 아홉 진성 중 하나인 차귀진성터가 남아있고, 자구내 포구에는 문화재로 지정될만한 오래된 등대인 도대불이 있다.

고산 옛 등대(도대불).
고산 옛 등대(도대불).

▲차귀현에서 고산리 사이의 역사

1300년(충렬왕26) 탐라를 동도와 서도로 나눠 15현을 두었는데, 당시 고산리 지역은 차귀현에 속했다. 조선 초기인 1416년 제주목·정의현·대정현으로 3읍 행정체제 개편이 이루어질 때 현감이 다스리는 대정현에 속하다가 1609년(광해 1년) 행정체계가 좌면·중면·우면으로 바뀌자 차귀현은 대정현 우면에 속했었다.

또한, 1786(영조 44년) 우면을 신우면(애월)과 구우면(한림·한경)으로 나눌 때 대정현 우면에 속했던 고산지역은 대정현에서 분할하여 제주목 구우면으로 편입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당시의 면사무소가 있는 마을의 이름으로 면 이름을 정하도록 일제가 강제함에 따라, 1935년부터 구우면이 한림면이 되고, 고산은 한림면에 속했다.

1956년 넓은 한림면을 나눠 신창리를 면소재지로 하는 한경면이 새로운 면으로 출범함에 따라, 이 지역 고산리는 한경면에 속하며 오늘에 이른다.

17세기 발간된 제주도지도(동여비고)에는 이 지역을 대정현 차귀포로, 탐라순력도(1702년)에는 지금의 수월봉을 고산(高山)으로, 고산포구를 사귀포(蛇鬼浦)로, 고산리 지경을 적색으로 차귀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제주의 9진 중 하나인 차귀진성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1861년)에도 이 지역을 차귀로, 탐라약도(1923년)에는 구우면 고산리로 표기하고 있다.

왜구들의 잦은 침입으로 사람이 살지 않던 이곳에, 1837년부터 많은 사람이 이주하여 큰 마을이 들어서면서 이 지역은 신두모라 불렸고, 1861년 향사(도가집)가 처음으로 들어서면서 당산리로 개칭되고, 1892년 당산리를 고산리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월봉 엉알 절벽에 박힌 화산탄.
수월봉 엉알 절벽에 박힌 화산탄.

▲수월봉과 해안길 엉알의 숨은 이야기

연중 100일이나 폭풍이 몰려드는 수월봉을 바람의 언덕이라고도 부른다. 바람의 세기로는 제주시의 연 평균 풍속이 초속 3.5m, 서귀포는 초속 2.9m인데 반해 수월봉은 초속 7m라고 한다. 그래서 태풍의 길목인 수월봉에 바람을 예측하는 레이더 관측소 기지가 들어섰으리라.

탐라순력도(1702년) 한라장촉 등 고지도에는 지금의 수월봉을 고산(高山)으로 표기하고 있다. 77m의 높이의 낮은 언덕인데도 높은산(노꼬메)라 부르고 있음이 이채롭다.

수월봉은 1만 8000여 년 전 땅속에서 올라온 마그마가 바닷물을 만나 폭발하여 이루어졌다고 한다.

수월봉이 형성된 시기는 해수면이 최대 150m까지 내려간 마지막 빙하기에 해당된다. 한반도 서쪽 바다인 황해의 평균 해수면 깊이가 50m 정도이니, 서해에는 해발 100m 높이의 육지가 솟아나 대륙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일본 오키나와 중국과 제주도는 물론 이어도(socotra rock)가 육지로 드러났을 때 수월봉이 생겨났다고 한다.

수월봉은 일출봉처럼 바닷속에서 폭발한 수성화산체이다. 그런데 일출봉 정상에는 분화구가 있는 반면, 수월봉 정상에는 분화구가 없다.

5000여 년 전 폭발한 일출봉은 화산체가 온전히 남아있지만, 1만8000년 전에 폭발한 수월봉은 긴 세월을 거치며 정상이 조금씩 깎여나가 화산체의 일부만 남아있다.

지질전문가들은 수월봉 동쪽 해안길인 엉알 절벽에 박힌 화산탄의 방향을 관찰하면 이를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대개의 화산탄은 바다로 향해 있었다.

다시 말해 수월봉의 분화구는 차귀도와 사이에 있는 바닷속에 묻혀있다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수월봉 동쪽 해안길을 ‘엉알길’이라 부른다. 엉은 제주어로 벼랑 또는 절벽을, 알은 아래쪽이니, 엉알길은 벼랑 아래 있는 길이란 의미이다.

수월봉 해안지대에서 출토된 선사유물과 엉알의 화산체는 신석기와 화산학 연구의 교과서 역할을 하고 있어, 1998년에 제주고산리선사유적지(사적 제412호)로, 2000년에는 차귀도천연보호구역(천연기념물 제422호)로, 2009년에도 제주수월봉화산쇄설층(천연기념물 제513호)으로 지정되었고, 2010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연달아 지정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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