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 추사도 칭찬한 글씨…명필·명문으로 이름 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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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용국, 해방 후 서귀면 건준위원장…1948년 국회의원선거서 당선
 오유붕, 일본서 항일 활동…민족 차별 정책에 저항하며 동포 규합
 오응삼, 서귀포시 토평리 출신…1960년 제주대학교 학장 서리 발령
 오인호, 유림 반수 지낸 후 한림읍 명월리서 30여 년간 후진 양성
 오일서, 교육계에 헌신…공장·양계장·과수원 등 운영하며 계몽운동
 오장헌, 학문 뛰어나 산남의 거장으로 칭송…문집 ‘동암유고’ 남겨
 오점, 송설체·금석서에 독보적 솜씨…1827년 제주향교 이설 자문도
오점의 유필 일부. 오점은 송설체를 중시해 썼으며 금석서에 독보적인 존재였다. 문장력도 뛰어나 이름을 날렸다.
오점의 유필 일부. 오점은 송설체를 중시해 썼으며 금석서에 독보적인 존재였다. 문장력도 뛰어나 이름을 날렸다.

▲오용국吳龍國:1904(광무8)~1950(납북), 정치가, 국회의원, 해방 후 효돈수리조합장 역임.

6·25에 의해 서울에서 납북당했다. 서귀포시 신효리(쉐둔)에서 오방률(吳邦律)의 아들로 태어나 1940년 서귀면장을, 1945년 8월 20일 그는 서귀면 건준(建準) 위원장에 취임, 1947년 3월 입법의원 선거에서 당선돼 ‘국회의원 선거법’등 18건의 법률을 제정했다.

1948년 5·10선거 때 남제주군선거구에서 입후보해 강성건, 양기하(梁基河) 등과 겨누어 1만6000여 표로 당선되고 민주국민당에 입당했다.

처음 헌법제정위원으로, 다음 교체(交遞)분과위원으로 활약했다. 1948년 8월 5일 제헌국회의 제40차 본회의에서는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특별위원회’ 구성에 관한 동의안을 가결, 기초특별위원 28명이 조직될 때 오용국 의원도 이에 선출됐다.

1950년 6·25로 동년 7월 18일 서울에서 납북(拉北)당했다. 1978년 2월 신효리 이민 이름으로 입법의원 및 국회의원 오용국 추모비를 월라봉 입구에 건립했다.

▲오유붕吳維鵬:1923(일제강점기)~?, 재일교포, 일본 도쿄에서 항일 활동.

서귀포시 토평리(돗-드르)에서 오성태(吳成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도일해 밤에는 와세다(早稻田)실업학교 야간부에 다녔다. 같은 학교의 학생 김신형(金辛亨)의 지도로 일본인의 민족적 차별정책에 저항, 동지로 규합했다. 1944년 5월 탄로나 도쿄경시청(東京警視廳)에서 동년 9월 송치됐다.

이어 도쿄형사지방재판소로 송치, 물론 패전 직전이라서 가혹한 형벌이 내려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1941년 특히 직장에서 주는 노임이 일본인과의 현격한 차이가 나는 것에 격분, 한국인의 참된 자유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 일본이 패전하게 되면 미(美)·영(英)의 지원을 얻어 독립을 성취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1942년 8월 중순경 도쿄에 사는 동포를 목표로 해서 동지를 물색하던 가운데 드디어 가네미츠(金光安守), 오지로(大城珅壽), 구레모토(吳本茂雄)를 차례로 맞이해 누차에 걸쳐 김신형의 숙소에 모여 회의를 가진 바 있었다.

각자 서로 민족적 의식을 피력하면서 단결을 강화했다.

▲오응삼吳應三:1905(광무10)~2004, 교육자, 대학교수.

서귀읍 토평리(돚-드르)에서 태어나 도일해 신호(神戶)상대를 졸업했다.

1960년 5월 1일 제주대학 및 고교 학생 공동주최로 관덕정 과장에서 4·19혁명 희생자에 대한 합동위령제를 거행, 동년 5월 6일 제주대학교 학생들이 인책 사퇴요구에 사표를 제출하고 4·19 이후 학내의 혼란으로 동년 6월에 사임하고 떠났다.

1960년 6월 11일 제주대학장 서리(署理)로 발령났다. 1960년 11월 15일에 제주대학장 추거(推擧)합동대책위원회, 제대(濟大) 일반교수회와 학생수습대책위원회의 연석 합동회의는 학생대책위원회의 주관(主管)으로 진행돼 전임(專任)학장 추거 문제에 대한 상호간의 의견이 제사돼 타협안(妥協案)이 모색됐다.

▲오인호吳仁瑚:1849(헌종15)~1928(일제강점기), 서당 훈장, 제주향교의 도훈장, 호는 월헌月軒, 본관 군위. 호는 화곡(禾谷).

한림읍 명월리에서 태어나 애월읍 납읍리(과납)의 진사 김용징(金龍徵)의 문하에서 익혔다. 유림의 반수(班首)를 지내고 명월리에 서재를 열어 30여 년간 후진을 가르쳤다.

1917년 12월 문하생 김영식(金英植), 조병현(趙秉鉉), 조봉규(趙奉奎), 박문휘(朴文徽) 등이 주축이 돼 명월대 서쪽에 ‘월헌 오인호선생지비’를 세웠다.

▲오일서吳日瑞:1913(일제강점기)~1979, 교육자. 한학자 오문복(吳文福)의 선친.

오승옹(吳承雍)의 아들로 성산읍 신풍리(냇끼)에서 태어났다.

전패(殿牌) 매안(埋安)에 불복했던 오방렬(吳邦烈)의 손자이다.

교육계에 투신해 백수(白水)·표선(表善)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전라남도 다도(茶道)·연도(鳶島)·광양(光陽)·약수(藥水) 등의 초등학교 교장을 역임, 1964년 대통령면려포장을 받았다.

서울 화곡동 강남시사(江南詩社)에 출입하며 아들 문복(文福)이 정리한 향현(鄕賢) 문집을 번역했다.

항일 감정이 짙은 가정이었기 때문에 신식교육을 받지 못하고 백부인 백옹(伯雍)공에게 한학을 익히다가 시대 조류를 거역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신식교육을 받아도 일제의 관리는 되지 않을 것을 전제로 부모의 허락을 받고 정의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갔다.

일본으로 건너가 중앙공업화학연구소의 학정(學程)을 수료하고 돌아와 지방청년을 계몽할 목적으로 비누공장을 운영하는 한편 양계장, 과수원 등을 직영하면서 계몽운동을 폈다.

▲오장헌吳章獻:1849(헌종15)~1903(광무7), 한말의 훈장, 자는 성지(誠之), 호는 동암(東庵), 본관은 군위.

성산읍에서 태어나 의청(毅淸) 오진조(吳眞祚)에게 글을 배워 ‘산남의 거장’이라고 일컬어졌다. 이러한 학행이 조정에 알려져 행의(行誼)를 천거하려 했으나 사양해 오직 훈학으로 일관했다.

문집 ‘동암유고(東庵遺稿)를 남겼는데 정의군(旌義郡) 일대에서는 오장헌, 오봉조(吳鳳祚), 오진조(吳眞祚) 등 3인을 ‘오문삼은사(吳門三隱士)’라고 일컫는다.

▲오점吳霑:1764(영조40)~1856(철종7), 문인, 서예가, 서당 훈장, 자 시지(時之), 호 청파(靑坡), 본관 화순,

1786년(정조10) 사마시에 합격, 1794년(정조18) 어사 심낙수(沈樂洙)에 의해 시행될 때 논(論)에 3등, 부(賦)에는 2등을 했다.

오점의 아들 소림(小林) 오태직(吳泰稷)도 사마시에 급제, 손자 연와(蓮窩) 오경로(吳卿魯)도 시문에 능해 3대에 걸쳐 문명(文名)을 떨쳤다.

1827년(순조27) 겨울 제주향교를 비룡못(飛龍池) 근처인 현 위치로 이설할 때 도감(都監) 정원집(鄭元集), 장의(掌議) 현언범(玄彦範)과 김응길(金應吉) 등을 잘 움직여 자문에 응했다.

글씨를 잘 써서 유배온 추사(秋史)도 그의 필법을 칭찬했다고 한다.

송설체(松雪體)를 중시해 썼으며 금석서(金石書)에 독보적인 존재였다. 또 문장력이 뛰어나 한때의 공사문(公私文)이 그의 솜씨에서 이루어졌으며 연상루중수상량문(延祥樓重修上樑文), 망경루개건상량문(望京樓改建上樑文) 등이 현재 전해진다.

한정운(韓鼎運) 목사 때에 쓴 글씨 동문상량문(東門上樑文)도 현재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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