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이를 잃은 슬픔이 흘러넘쳐 샘물이 됐다
누이를 잃은 슬픔이 흘러넘쳐 샘물이 됐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115) 수월봉·차귀진성
전설 속 남매 이름을 따서 ‘녹고물 오름’·‘수월봉’으로 불려
차귀진성 있던 고산리…고산교회 부근 등에 성담 남아 있어
수월이와 녹고 남매의 구슬픈 전설이 깃든 수월봉 해안 절벽. 수월봉 앞바다는 유난히 물살이 세서 해난사고가 잦았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는 바다에서 생을 마감한 선인들의 영혼이 이어도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수월이와 녹고 남매의 구슬픈 전설이 깃든 수월봉 해안 절벽. 수월봉 앞바다는 유난히 물살이 세서 해난사고가 잦았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는 바다에서 생을 마감한 선인들의 영혼이 이어도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수월봉에 깃든 전설

고산리 수월봉에는 수월이와 녹고 남매의 구슬픈 전설이 내려온다. 홀어머니의 중병을 낫게 해드리기 위해 남매는 구할 수 있는 약을 모두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하루는 울고 있는 남매를 가엽게 여긴 한 스님이 어머니 병에 좋다는 백 가지 약초를 말해 주었다. 99가지를 구하고 마지막 하나를 찾지 못해 걱정하던 남매는 수소문 끝에 수월봉 절벽에 있다는 약초를 발견하였다.

위험도 잊은 채 벼랑 중간까지 내려간 수월이가 약초를 캔 순간 어머니를 살릴 수 있다는 기쁨에 바위를 잡았던 손이 풀려 절벽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수월이의 죽음을 지켜본 녹고는 누이의 시신을 부여안곤 울부짖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얼마 후 녹고의 울부짖음이 땅속 깊이 메아리쳐 돌아왔는지, 근처의 바위틈에서 맑은 샘물이 솟아 나오는 게 아닌가.

효성이 지극한 수월이와 녹고 오누이의 애절한 죽음을 측은하게 여긴 이곳 사람들은 바위틈에서 솟는 물을 녹고의 눈물이라 하고, 수월이가 떨어져 죽은 오름을 녹고물오름·물나리오름·수월봉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을 간직한 수월봉 앞바다는 유난히 물살이 세어 해난사고가 잦았다. 그래서인가 이곳 사람들은 말하길 바다에서 못다한 생을 마감한 선인들은 영혼이 되어 이어도에 살고 있다고도 했다.

▲제주 9진의 하나인 차귀진성

지금의 고산1리 2228번지는 조선시대 제주의 9진 중 하나인 차귀진성이 있던 곳으로 근처에는 진사와 객사가 있었고, 2190번지에는 무기고도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이곳에 몽고의 목축관리소인 서아막이 있었다. 제주에 상륙한 삼별초가 여몽연합군에 패한 1270년대 후반, 몽고는 탐라목장을 설치하면서 정의현 수산에 동아막을, 서쪽인 고산에 서아막을 두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외적이 자주 출몰하는 제주도를 방어하기 위하여 1439년(세종 21년) 제주도 안무사 겸 목사 한승순은 서아막 터인 이곳에 방호소를 세웠다. 성을 쌓고 성안에 군기고도 마련할 정도로 이곳은 제주목의 중요한 요충지였다.

1705년(숙종 31년, 목사 송정규) 이후에는 국가 진상용 소를 키우는 모동장(毛洞場)이 이곳 서아막 목장터와 대정지역에 걸쳐 조성되기도 했었다.

특히 차귀도를 거점으로 하는 왜구의 침범에 대비하기 위해 1652년(효종 3년) 이원진 목사가 둘레 2466척(1척: 30㎝), 높이 12척의 성을 이곳에 쌓고 병영을 만들어 차귀진이라 했다.

지금의 지적도를 분석해보면 차귀진성은 동서 190m, 남북110m, 둘레 620m의 크기로 이루어진 동서 방향의 장축 타원형의 진성이라 여겨진다. 차귀진에 병영이 들어서면서부터 왜구의 침입이 이곳에서 점차 줄어들고 평화가 찾아왔다.

고산리 주민들은 지금도 차귀진성이 있던 지역을 ‘성안’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처럼 차귀진성은 여전히 주민들에겐 친숙한 이름으로 남아 있다. 1930년대에 지어진 고산교회 부근을 비롯하여 동문과 서문 그리고 우물이 있었던 주변 등 여러 곳에 성담이 남아 있음이 그나마 다행이라 여겨진다.

차귀진성 터를 안내한 고산리 출신 고동희(1948년생) 해설사에 의하면,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황폐화된 진성은 1950년대까지도 도처에 남아있었으나 산업화를 거치며 그나마 남아 있던 성담이 우리 손에 의해 사라졌다고 한다.

고산교회(1916년 설립) 주변 성담 흔적.
고산교회(1916년 설립) 주변 성담 흔적.

▲차귀진성의 크기와 주둔 병력

이원진 목사가 구축한 차귀진성에는 동서에 2개의 성문과 성안에 진사·객사·무기고와 우물 1개가 있었다. 차귀진의 우두머리는 조방장이었으며, 송정규 목사에 의해 만호로 승격되었다가 10년 후인 1716년(숙종 42년) 어사 황구하에 의해 조방장으로 격하되었고, 1906년(고종 43년) 조방장을 폐하고 무기고를 없애면서 진성으로서의 역할은 막을 내렸다.

참고로 조방장은 지금의 5~6급, 만호는 3~4급 정도에 해당하는 무관 벼슬이며 명월진성의 우두머리는 만호였다.

‘차귀진성 성정군은 134명이고 치총이 2명, 조방장 1명, 양방군이 50명, 첨방군이 53명, 서기 8명, 포수 1명, 활 만드는 사람 6명, 화살 만드는 사람 6명이다. 동쪽과 서쪽에 문이 있고 문 위에 초루가 있다. 객사는 3간이고, 군기고도 3간이다. 그 중간에 우물이 하나 있다. 이 진은 마을이 멀리 떨져 있는 후미지고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 있어, 뜻하지 않은 사변을 당하면 입번하는 병졸만으로는 방어하기가 어렵다’

위의 기록은 18세기에 편찬된 ‘증보탐라지’에 실린 내용이다. 이로 보아 당시의 차귀진성에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상당한 군사들이 주둔했음과 함께 진성 주변에는 마을이 형성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870년 펴낸 ‘대정군군병도안(제주도 유형문화재 제29호)’에 의하면, 차귀진 소속의 방군은 총 128명이었다.

제주목사 이원조의 ‘탐라록’.
제주목사 이원조의 ‘탐라록’.

▲탐라지를 편찬한 목사 이원진과 탐라록의 이원조

차귀진성을 처음 구축하였을 뿐만 아니라, 현재 제주에 전하는 최고(最古)의 읍지(邑誌)로 알려진 ‘탐라지’를 편찬한 목사 이원진에 대하여 덧붙인다.

이원진 목사가 재임하던 1652년 3월에는 중국 상인이 정의현에 표류하여 213인 중 28인만 살아남았고, 1653년 8월에는 하멜 일행이 대정현 차귀진 아래인 대야수포(大也水浦)에 표류하여 64명 중 36명이 살아남기도 했다.

이원진 목사와 이름이 비슷한 이원조는 1841년 윤 3월부터 1843년 6월까지의 제주목사로 재임 중 일기체 형식의 ‘탐라록’을 남겼다. 탐라록에는 차귀진성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차귀진에서 점심을 먹었다. 진의 모양새가 아주 쇠잔했다. 성안에는 인가가 없었으며 피로한 병졸 십여 인이 있었는데, 가죽옷을 입은 형상이 짐승 같았으며 지키는 일에는 아주 소홀하니 걱정이다. … 저물녘에 명월진에 도착하여 묵었다. 성첩과 창고가 자못 진의 모양새를 갖추었는데 성 안과 밖에는 인가가 많았다.”

이로 보아 근세에 넘어가면서 차귀진성의 일부 역할이 같은 제주목 우면에 있던 명월진성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