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득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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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양진 수필가

갑자기 비가 와 우산을 펼쳤다. 우산살이 부러진 것을 잊고 있었다. 차가 있는 데까지 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한쪽 면이 주저앉은 우산을 쓰고 나가든지 그냥 비를 맞든지.

무엇이든 척척 고치던 아버지가 생각났다. 남편에게 고장 난 우산을 내민 것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얼마 안 하니 새것으로 사지 뭐.” 예상한 대답은 그대로 돌아와도 섭섭하다. 시간의 효율성을 따지며 그 시간에 다른 것을 하는 게 더 낫다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해댄다. 더 나은 게 뭐냐고 물으려다 꾹꾹 눌렸다.

볼품없는 우산을 들고 대문을 나간다. 하긴 언제 고장 난 물건을 고치며 살았다고.

몇 푼 안 한다는 이유로 사용하는 물건에 흠이 있거나 고장이 나거나 빛바래 있으면 지지리 궁상떠는 것 같아 정 떼듯 떠나보냈다. 그 자리에 고개 드는 것은 새것에 대한 물욕.

발품을 팔지 않아도 클릭 한 번으로 주문한 상품이 현관까지 배달되는 시대다. “택배입니다.” 오늘도 버선발로 뛰쳐나가고픈 반가운 목소리가 대문을 두드린다. 받아 든 설렘에 입으로 “두두두두” 효과음을 내며 구매한 상품의 상자를 뜯는다. 우와! 이 휘발성 같은 감탄사를 자주 내뱉으려면 애착 대신 싫증이 몸에 배어 있어야 한다. 흠이 있어서, 낡아서,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들어서, 고장이 나서, 남들이 다 갖고 있어서…. 새것을 사야 할 구실은 많다.

하나를 얻으면 일실(一失)이 따르는 것은 불변의 진리다. 새것이 주는 흠 없는 완벽함에 매료당하는 대신 손때 묻은 추억과 어떤 것을 고치며 느낄 아기자기한 재미는 잃게 된다.

쉽게 버리고 쉽게 사는 이런 것들이 나의 성격에 유기적으로 눌어붙고 있음을 감지한다. 한 해 한 해 지남에 따라 생각이나 행동이 눅진해야 할 텐데 예전보다 더 대충대충이다. 두꺼운 책을 선호하던 내가 얄팍하고 짤막한 내용의 책을 고른다. 인터넷 기사를 정독으로 읽지 않고 설렁설렁 훑는다. 새로운 요리 레시피를 검색할 때도 ‘간단히’를 꼭 집어넣는다.

진득함이 사라졌다. 기다림이 주는 빛깔과 냄새와 소리를 건너뛰고 있음이다. 빠르게 지나치는 풍경처럼 나는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

뭐든 즐기며 하는 친구를 떠올린다. 하는 일도 음식도 예외가 아니다. 요즘 뭐 먹고 사냐는 질문마저도 맛있게 받아들인다. 좋아하는 요리 하나를 만들기 위해 육수를 내고, 빚고, 찌고…. 나로서는 상상도 못할 귀찮음이 즐겁단다. 자신이 만든 음식을 먹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친구를 생각하며, 나는 깨닫는다. 항상 웃고 있는 그 표정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님을. 무슨 일을 하든 그 과정이 즐거우니까 삶의 여유가 스며 있었던 게다.

진득함에서 여유가 나온다. 여유를 가방 싸는 것과 비교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가방이 크면 거기에 자기가 필요한 물건들을 넣으면 되지만, 작은 가방은 무엇을 포기해야 할지 먼저 생각한다는 것이다. 크다는 것과 작다는 것은 마음가짐부터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어느 정도 크기의 가방을 갖고 있는 걸까.

구멍 난 양말을 버리다가 멈칫해선 잊고 있던 바늘과 실을 찾으며, 나는 소망한다. 임인년 새해의 출발점에서 이처럼 소소한 변화가 일상의 삶에서 진득함을 되찾는 작은 몸짓이 되길. 그리고 올해에 치러질 두 번의 선거, 그 선택 앞에서 나의 이 진득함이 빛을 발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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