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모의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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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심 수필가

어머니는 오늘도 여지없이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어머니의 책상은 아버지와 마주했던 동그란 밥상이다. 그 위에는 늘 연필과 지우개, 공책과 천자문 책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 한자 쓰기를 시작했다. 한 자 한 자 칸이 나뉜 공책에 글자를 쓰면서 어머니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린 날 다하지 못한 공부의 여한을 풀기라도 하는 듯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다. 심지어 그리 좋아하던 텔레비전의 연속극조차도 재미없다고 하신다.

어느 날은 어머니의 공책을 보고 놀랐다. 한 글자도 흐트러짐 없이 칸을 채우며 쓰고 있었다. 마치 인쇄되어 진 공책의 글자를 보는 듯했다. 얼마나 공을 들이고 쓰고 있는지, 그렇게 써놓은 공책이 밥상 높이만큼 올라갔다.

이걸 쓰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몰라.”

막 동굴을 빠져나온 아이처럼 흰 이를 드러내며 배시시 웃었다. 어머니는 한자를 따라 쓰는 동안은 다른 세상을 사시는 것 같다. 무엇이 어머니를 이리 하게 하는 것일까. 구순을 눈앞에 둔 노모.

며칠 전 어머니의 근심거리였던 귤을 다 땄다. 어머니 몫으로 남겨진 귤나무 몇 그루는 수확 시기가 모두 달랐다. 만감류에 속하는 나무들이라 열매의 모양이나 색, 맛도 여러 가지다. 눈이 오기 전에 다 따느라 했는데도 키 큰 나무 한 그루가 열매를 잔뜩 이고 남아 있었다. 아버지가 생전에 접붙여서 키워낸 새로운 품종의 귤이라고 했다.

누구한테 물어보면 알 수 있을까?”

혼잣말처럼 어머니는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열매 맺는 걸 보지 못한 채 돌아가신 아버지의 아쉬움이 더해진 탓인지, 그 궁금함은 더 커지는 듯했다. 붉게 익은 귤은 어머니의 의문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눈 속에서 더 싱싱함을 발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급기야 내게 명했다. 저 귤 한 상자 들고 가서 어떤 귤인가 이름을 알아 오라는 것이었다. 달콤하고 예쁜 귤 맛있게 먹으면 되지 꼭 이름을 알아야 해요, 마뜩잖은 내색을 했다. 끝내 어머니는 그 귤의 이름을 알아내었다. 평생 농사를 지으면서 품종 개량을 하거나 새로운 농법으로 수확한 것들을 자식이나 진배없이 귀하게 여긴 탓이었을까. 싹이 트고 파릇파릇 잎이 돋고, 꽃이 피어 열매가 맺는 그 안에 함께한 시간과 염원이 깃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한 그루의 귤나무, 이 세상에 열매로 맺힌 한 알의 귤에 대한 노모의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책이 나왔다. ‘나는 영 살았쪄라는 제목의 팔십 대 어르신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농사를 지으며 그동안 가슴에 묻고 살았던, 어쩌면 자신이 누구라고 어떤 사람이라고, 그리고 당신이 좋아하는 게 무어라고 내놓아 본 적이 없는 이들의 이야기다.

내가 좋아하는 건 꽃, 그런데 평생 밭농사만 지었지. 어릴 적 꿈? 일제 강점기와 4·3사건으로 모두 허사가 되었어.’

책을 열고 마주친 어머니 이름 석 자. 책 안에서 보는 어머니 이름은 내가 모르는 별이었다. 시간과 공간이 무색한 사이, 어머니와 나는 왜 모든 걸 다 아는 절대적인 사이로만 생각했을까. 어머니만의 한 세계가 있음을 왜 미처 몰랐을까. 가까이 있으면서도 알지 못했던, 내색하지 않았던 어머니의 이야기가 초롱초롱 별처럼 박혀 있었다.

어머니는 다가오는 봄에 심을 귤나무 접목을 알아본다. 살아계시는 동안 열매를 볼 수 없어도 심어놓겠다고 한다. 노모의 마음에는 늘 새로운 해가 떠오르나 보다. 어머니가 다시 책상을 끌어당긴다.

나는 무엇을 질문하며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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