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 콜레라 퇴치에 심혈…제주도의사회 초대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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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정빈, 1706년 문과 급제 후 예조좌랑 등 재임…유고 ‘조헌집’ 남겨
 오정숙, 항일 운동하다 1940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선고받아
 오주언, 총명하고 결단력 있어…1926년 순종 황제 인산 때 망곡 주도
 오진조, 예학에 능해 ‘가례집요’ 저술…정의현 ‘오문삼은사’로 불려
 오창흔, 의사자격시험 합격 후 후생의원 개원…전남도립 제주의원장
오창흔은 1936년 의사자격검정시험에 합격해 전남도립제주의원 소아과와 내과에서 2년간 일했다. 해방 이후에는 도립제주의원 원장에 취임했다. 사진은 1912년 현재 이아터에 신축한 자혜의원(전남도립 제주의료원의 전신) 전경. 출처: 제주시 발간-제주성(濟州城) 총서
오창흔은 1936년 의사자격검정시험에 합격해 전남도립제주의원 소아과와 내과에서 2년간 일했다. 해방 이후에는 도립제주의원 원장에 취임했다. 사진은 1912년 현재 이아터에 신축한 자혜의원(전남도립 제주의료원의 전신) 전경. <출처: 제주시 발간-제주성(濟州城) 총서>

▲오정빈吳廷賓:1663(현종4)~1711(숙종37), 문신, 예조좌랑, 전라도 만경현령, 자 흥숙(興叔), 호 조헌(兆軒), 본관 군위.

서귀포시 토평동(돚-드르) 오현(吳睍)의 아들이다. 전적 고홍진(高弘進)의 외손, 유배 온 신명규(申命圭)에게 배워 1687년(숙종13) 사마시에 합격, 1689년부터 정의현에 유배된 김진구(金鎭龜)에게 고만첨과 함께 글을 배웠다.

1706년(숙종32) 가을 이해조(李海朝)가 내도해 오정빈, 고만첨, 정창원(鄭敞遠) 등 3명을 시취, 1707년 별시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했다. 이 해에 제주에 유배 온 김진구의 아들 북헌(北軒) 김춘택(金春澤)은 선친이 가르친 오정빈과 고만첨의 문과 급제의 기쁨 속에 젖어들었다.

이에 정의현에서는 일찍이 문과에 입격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고을 사람들은 그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성균관학유·학록·학정·저작·박사 등을 두루 거쳤다. 그 사이에 승정원가주서를 지냈는데, 규모가 있고 민첩하다는 평을 받았다. 이어 전적·승의랑(承議郞)에 오르고 예조좌랑에 옮겨졌으며 춘추관기사관을 겸임했다. 1710년(숙종36) 윤 7월에 전라도의 만경현령으로 도임해 재임 중에 1711년 1월 관아(官衙)에서 죽었다.

문장과 필법은 북헌 김춘택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유고 ‘조헌집(兆軒集)’이 있다.

※오정빈의 시=산방산山房山, 跨峨臨水揷雲鬟:물가 구름 속에 선산이 솟아/ 秀色崢嶸俯世間:빼어난 봉우리는 이 세상을 내려다보네!/ 削出芙蓉開右室:연꽃처럼 봉우리 위에 석실을 열었으니/ 海中是亦一名山:해중에 또 하나 명산이로세./ 深深蕭寺一靑山:푸른 산 깊은 골에 쓸쓸한 절/ 僧去寺空雲影閑:중이 떠나간 빈 절에 구름만 감돌더니/ 何事晩來還久住:어인 일로 늦게 돌아와 오래 머무는지/ 暗明門外是人間:어두웠다 밝아지는 문 밖은 바로 인간 세상인데

▲오정숙吳禎淑:1891(고종28)~1958, 무극대도교의 항일 활동, 본관 군위, 오찬백(吳贊伯)의 아들.

표선면 가시리(가스름)에서 태어나 1936년 5월경 강승태(姜昇泰·46·하예)의 권유로 무극대도교(無極大道敎)를 믿게 돼 핵심 신도로서 포교에 활약했다.

1938년 12월 13일 취조 끝에 21명을 기소했는데 그는 1940년 12월 4일 광주지법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및 벌금 50원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오주언吳周彦:1881(고종18)~?, 호 청봉(靑峰).

총명해 모든 일에 과단성이 있었다. 순종 황제 인산(因山) 날 망곡(望哭)을 주도, 왜경의 회유를 거절하지 아니하고 면리(面吏)가 됐으나 친일파 면장에게는 존대를 하지 않았고, 공출(供出) 및 부역(賦役)에 많은 편의를 주었기 때문에 지금도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정의현 좌(左)면 상천리(上川里·내-끼)에서 태어났고 동면 고성리(고-정의)에서 살았다.

일제강점기 운동회 때 일인(日人)들과의 마찰로 투옥(投獄)된 일이 있다.

※오주언의 시=地 땅, 配天地闢丑初頭 하늘과 짝지은 땅 축시초에 열리고/ 山岳蒼靑河海流 산악은 푸르르고 물은 바다로 흘러/ 萬物由生始培土 만물이 모두 땅에서 생겨났네!/ 區區水陸幾車舟 물과 땅에 자잘구레한 수레와 배는 얼마인가!

오진조의 필적.
오진조의 필적.

▲오진조吳眞祚:1823(순조23)~1898(광무2), 문인, 서당 훈장, 자는 대중(大仲), 호는 청계(淸溪) 또는 우청(尤淸), 본관은 군위.

성산읍 천미촌(川尾村·현 신풍) 출생으로 아버지 오봉훈(吳鳳勳)과 어머니 연주현의 차남이다.

어릴 때부터 만구와 김진구(金鎭龜), 북헌 김춘택(金春澤) 부자의 학통을 이으면서 종가의 학풍을 살려 금성(錦城) 김성한(金聲翰)에게 글을 배웠다.

후진 강학(講學)에 힘쓰면서 특히 예학(禮學)에 뛰어났다. ‘가례집요(家禮輯要)’를 지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오진조는 오봉조(吳鳳祚), 오장헌(吳章獻)과 함께 정의현의 ‘오문삼은사(吳門三隱士)’라 하여 모범을 보인 인사들이다.

▲오창흔吳昶昕:1908(융희2)~1989, 개업 의사, 호는 인산(仁山).

성산읍 오조리(오졸-개)에서 태어나 성산포의 정신사숙(正新私塾), 성산사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이어 현대의학에 뜻을 두어 1935년 평양의 기성(箕城)의학강습소에서 1년 과정을 이수했다.

이듬해 조선총독부에서 실시하는 의사자격 검정시험에 합격, 전남도립 제주의원의 의무촉탁으로 소아과와 내과에서 2년간 재임했다.

부산부립(釜山府立)병원 내과에서 임상실험 경험을 쌓은 뒤에 1938년 9월 제주로 들어와 후생병원을 개업, 일본 큐슈(九洲)제국대학 의학부에서 1년 습득하고 돌아와 다시 후생병원의 문을 열었다.

조국이 해방돼 도립제주의원 원장에 취임했다.

1946년 호열자의 유행이 심해지자 이를 퇴치하는 데 심혈을 기울었다.

1947년 ‘3·1 기념제주도투쟁위원회’가 조직돼 위원장에 안세훈(安世勳), 부위원장에 그가 추대됐다. 이후 부산으로 옮겨 개업의를 이었다.

1947년 2월 23일 제주도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고 개회벽두 긴급동의로 명예의장에 스탈린 수상, 박헌영, 김일성, 허헌, 김원봉(金元鳳), 유영준(劉英俊) 등 6명을 추대하고 제주도 의장단에는 안세훈(安世勳), 이일선(李一鮮), 현경호(玄景昊), 부의장단에는 김택수(金澤銖), 김상훈(金相勳), 김용해(金容海), 오창흔(吳昶昕) 등이 선출되고 집행위원으로 김정로(金正魯) 외 33명을 선출했다.

또 1947년 6월 8일 도내의 의사(치과의사 포함) 20여 명으로 제주도의사회를 창설, 초대 회장이 됐으나 당시 4·3 사건으로 말미암아 사상적 갈등으로 오해를 받아 이듬해 6월 부산으로 생활 근거지를 옮겼다.

부산 남포동 2가 15번지에 오(吳)소아과의원을 개업, 사회적으로 신망이 두터워 부산의우회(醫友會) 회장, ‘재부산 제주도민회장’으로 추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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