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평야서 탐라인의 목축생활 펼쳐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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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저생문·모동장
길고 음산해 이름 붙여진
당산봉의 해식동굴 저생문

고려·조선시대 牛馬 기르던
녹남봉·돈두악 일대 모동장
규모 축소…1900년께 폐장
질토래비 탐사팀이 배를 타고 저생문 앞 바다에서 촬영한 사진. 저생문은 파도의 침식작용으로 생긴 십여 개의 해식동굴로 끝 닿을 데를 모를 정도로 길고 음산해서 이름 붙여졌다. 저생문 위의 바위는 새들이 남긴 변으로 하얗게 변해 있는데 이 또한 진기한 볼거리다.
질토래비 탐사팀이 배를 타고 저생문 앞 바다에서 촬영한 사진. 저생문은 파도의 침식작용으로 생긴 십여 개의 해식동굴로 끝 닿을 데를 모를 정도로 길고 음산해서 이름 붙여졌다. 저생문 위의 바위는 새들이 남긴 변으로 하얗게 변해 있는데 이 또한 진기한 볼거리다.

▲다양한 역사문화가 깃든 탐라순력도 차귀점부(遮歸點簿)

탐라순력도(보물 제652-6호)의 41화폭 중 하나인 차귀점부에는 여느 화폭보다 많은 제주의 역사문화들이 깃들어 있다.

‘점부’란 목사가 순력하는 대신 군관이 점검한 문서를 목사가 확인하는 절차이다. 차귀점부에는 차귀진성을 비롯한 차귀진 소속의 당산봉수와 우두연대의 위치 등이 표시되어 있다.

또한 지금의 고산포구를 사귀(蛇鬼)포로, 용수포구를 와포(瓦浦)로, 수월봉을 高山(고산)으로 표기하였다. 더욱 특이한 것은 당산봉 북서쪽 바닷가 절벽에 ‘저생문(這生門)’이라 표기한 점이다.

저승굴 또는 저승문으로 불리기도 하는 저생문은 낭떠러지 해변에 파도의 침식작용으로 생긴 십여 개의 해식동굴을 일컫는 한자어다. 제주어로 저싱고낭이라고 하는 해식동굴들은 끝 닿는 데를 모를 정도로 길고 음산하여 저승문이라 불리어 온다.

바닷새인 가마우지들의 서식처인 저생문 위의 바위는 오래전부터 새들이 남긴 변으로 인하여 하얀색으로 변해 있다. 이 또한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진기한 볼거리이다.

당산봉 해안 절벽에 감추어진 듯 있는 저생문 주변을 걷다보면 이곳이 곧 별천지임을 실감한다. 더욱 관심을 끄는 것은, 고려시대 탐라목장이 있던 모동장(毛同場)의 삼나무밭(毛同眞木)과 조선시대의 목장인 우자장(宇字場)에 대한 그림이다.

다음은 제주의 오래된 역사문화가 담겨있는 탐라목장에 대한 내용이다.

▲탐라목장의 시원을 찾아서

제주에 목장이 들어선 시기를 가늠해 본다. 탐라국의 개벽신화라고 전해지는 삼성신화에 송아지와 망아지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농경과 더불어 목축생활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목장을 이용한 본격적인 목축생활은 원나라가 1276년 성산읍 수산리에 말 160필을 방목한 데서 비롯된다고 하겠다. 제주에 상륙하여 응전하던 김통정 장군의 삼별초군이 여몽연합군에 의해 진압된 1273년 이후, 몽골은 탐라를 일본정벌의 전초기지로 삼는 한편 전쟁에 필요한 말들을 키우기 시작했다.

맹수가 없고 초지가 풍부하며 겨울이 온난하여 일 년 내내 말을 방목할 수 있다는 점이 바다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원나라가 제주에 탐라목장을 구축했던 이유로 여겨진다.

원나라는 탐라목장을 관리하는 아막(阿幕)을 두 곳에 설치했는데, 아막은 목장 운영의 본부이자 목호들의 거주지를 뜻하는 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여러 고서에 의하면, 수산진성 서남쪽의 수산평(水山坪)에 1276년(충렬왕 2년) 동아막을, 1277년 차귀평(遮歸坪: 한경면 고산리 차귀성지가 있었던 곳)에 서아막을 설치했다고 전한다.

원 제국이 설치한 14개 왕실목장 중 하나였던 탐라목장은 고려조정의 행정력 밖의 치외법권적인 존재였다. 여기에는 고려의 한 고을로서의 제주가 아닌, 나라로서의 탐라를 다스린다는 원나라의 지배 명분이 숨어있는 듯하다.

초기에는 탐라인과 고려인의 목장 접근을 금지했을 만큼 원 제국은 목호(하치)들을 내세워 탐라목장을 군사기밀을 다루듯 운영했다 전한다.

탐라목장이 설치된 초기에 원나라는 일본 원정을 준비하려 말을 반출하지 않다가 1295년부터 탐라마를 반출하기 시작했다.

탐라목장 중 동아막(수산평)에서 생산된 말들은 수마포(受馬浦: 수뫼밋, 일출봉 동쪽 포구) 등을 통해, 서아막(모동장)의 말들은 와포(瓦浦: 지삿개, 용수포구) 또는 당포(唐浦: 대평포구) 등을 통해 원나라 등지로 실려 간 것으로 여겨진다.

녹남봉은 대정읍 무릉리에서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에 이르는 제주 올레12코스의 중간 지점에 있다. 일대의 평야에는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까지 ‘모동장’ 불리는 광활한 목장이 있었다.
녹남봉은 대정읍 무릉리에서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에 이르는 제주 올레12코스의 중간 지점에 있다. 일대의 평야에는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까지 ‘모동장’ 불리는 광활한 목장이 있었다.

▲서아막에 위치했던 모동장(毛洞場)의 시종(始終)

2000년에 발간된 고산향토지에 의하면, 모동장은 고려 말에서 조선시대까지 신도리 녹남봉(옛이름: 용수악)과 영락리 돈도미오름(옛이름: 돈영악)을 중심으로 한 주변의 들판과 고산리 일곱로인 칠전동까지의 넓은 평야를 총칭하여 이르는 목장명이라고 한다.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는 모동장을 기록으로나마 그려본다.

1270년대 동서아막 두 곳으로 출발했던 탐라목장은 1300년대 8개로 분화되고, 8개의 목장은 조선시대 10소장의 기반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1350년대 들어 공민왕이 반원정책을 펼치고, 원나라에 이어 새로 들어선 명나라가 고려에 말 2000필을 강력히 요구하고, 이에 불응한 목호들이 난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에 1374년 최영장군 군대에 의해 목호의 난이 진압되면서 탐라목장은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탐라목장이 운영되는 과정에서 몽골인 거주 마을이 조성되었으며, 아막을 관리하는 목호들과 원주민 간에 접촉이 이루어지면서 제주선인들은 종래의 목축에 몽골식 방식을 접목하며 우마사육을 확대해 나갔을 것이다.

조선시대 들어와서는 제주도 산야가 대부분 우마방목지로 변해갔다. 이로 인해 제주의 농가는 우마의 농경지 침해 등으로 많은 피해를 당해야 했다.

그러자 1429년(세종 11) 영곡 고득종(오현단 향현사에 명도암 김진용과 함께 배향됨)의 제안에 의해 조정에서는 한라산 중허리에 목장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성종 때에는 탐라목장을 10소장으로 분할하여, 제주목에는 1에서 6소장을, 대정현에는 7소장과 8소장을, 정의현에는 9소장과 10소장을 두었다.

이외에도 대정현에 모동장을, 정의현에 산장을, 우도에 마목장과 가파도에 우목장을 설치하였다. 둘레가 37리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인 모동장은 이원진 목사의 탐라지(1653)에 따르면, 처음에는 말을 키우는 목장이었으나, 점차 우장(牛場)이 되었으며 후기에는 우마장으로 변화되어 갔다.

무릉리향토지(1987년)에 의하면, 우마감 1인, 군두 1인, 목자 18명을 두어 700여 두의 소와 말을 방목하고 관리하던 모동장은 점차 그 수가 줄어들어 나머지 마소들을 1800년대 말 7소장으로 옮겨졌고, 1900년께 폐장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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