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 삼대 진사 가문…시학으로는 제주 남쪽서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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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침, 19살에 승보시 합격…1898년 성균관 교수 임용돼 후진 양성
 오윤겸, 제주교육대 교수로 제5·6대 학장 지내…정부 국민포장 받아
 오태직, 진사 오점의 아들이자 오경로 아버지로 글씨와 문장에 출중
 오평윤, 일본서 공산당 활동…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받아
 오형, 학식 깊고 시문 능해 정평…‘계성사낙성’이라는 한시 전해져
 오화국, 구좌읍 하도리 출신…제주농업학교 학생 항일 운동 참여
 오흥태, ‘이인좌의 난’ 진압 위해 의병 모아…훗날 의사묘 건립돼
오태직 교지. 오태직은 글씨와 문장에 뛰어난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특히 시학에서는 ‘남주제일(南州第一)’로 일컬어졌다.
오태직 교지. 오태직은 글씨와 문장에 뛰어난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특히 시학에서는 ‘남주제일(南州第一)’로 일컬어졌다.

▲오침吳琛:1809(순조9)~1904(광무8), 문사, 향교의 도훈장(都訓長), 자는 공서(公瑞), 호는 송헌(松軒), 현령 정빈(廷賓)의 현손.

아버지 시효(始曉)와 어머니 고씨의 아들로 태어나 정의현 우(右)면 토평리(돚-드르)에 살았고, 19살에 승보시(陞補試)에 뽑혔다.

1847년에 목사 이의식(李宜植)이 서귀포 고근산(孤根山)을 대정경(大靜境)에 편입시키려 했다. 그는 글을 다음과 같이 지어 저지(沮止)시켰다.

그 문장에 “鶴脚雖長斷不步:학은 다리가 길어도 잘라버리면 걸을 수 없고/ 蛙亢雖短補不活:개구리목이 짧아도 더 붙이면 살지 못한다.”는 구절은 지금도 회자(膾炙)되고 있다.

1892년에 목사 이규원(李奎遠)의 천거로 성균관 교수가 되고 오랜 기간 도훈장의 직책을 받아 후진을 양성했다. 또 90세까지 장수해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가 주어졌다.

오윤겸

▲오윤겸吳允謙:1932(일제강점기)~1985,본관 군위.

구좌면 하도리(별방)에서 태어났다. 1953년 3월 오현고등학교를 거쳐 1957년에 서울대학 사범대 화학과를 졸업했다.

1957년 5월 모교 오현고의 과학과 교사로 8년여를 재임, 1968년 11월 제주교육대학 교수로, 1981년 3월 제주교육대학 제5대와 제6대 학장을 지냈다.

불행하게도 1985년 5월 학장 재임 중에 병사, 학교 교정에서 고별식(告別式)을 거행했다. 정부로부터 국민포장을 받았다.

▲오태직吳泰稷:1807(순조7)~1851(철종2), 문인, 서예가, 진사, 자는 여빈(汝賓) 또는 여대(汝大), 호는 소림(小林), 본관은 화순.

제주시 일도1동에서 진사 오점(吳霑)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제주시 월평동(다락굿)의 진주강씨 댁에 장가들어 평생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

1834년(순조34)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글씨와 문장이 뛰어나 시학(詩學)에는 ‘남주제일(南州第一)’이라는 평이었다.

아들 연와(蓮窩) 오경로(吳卿魯)도 시서(詩書)에 능했다.

오태직은 명필 오점의 아들이다. 또한 오경로의 아버지로서 진사이니 비록 향공(鄕貢)이라 하더라도 3대가 진사인 셈이다.

후손인 오원희가 3대의 교지와 과지를 모두 소장하고 있어 영예로운 일이다.

특히 시를 잘 지어 남쪽 지방 율시(律詩)의 첫째라는 평을 받았다. 지금도 몇 편의 시가 회자되고 있다.

교지는 다른 곳 교지들과 다를 바 없고 과지(科紙)는 시로서 대가의 풍도가 있다.

‘춘추와 요즘 세상에 무공을 의로운 전쟁이 없으니/ 누구가 능히 세운 무공을 사양하려 할까/ 옛날 진(晉)나라 문공이 제후를 모아 움직일 때/ 세 번 물러서서 그 기틀을 튼튼히 하였네.’라고, 몇 줄만 읽어도 붓을 머뭇거림이 없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태직의 시= 水仙花 수선화:昨日一花始見嘉:어제 한 송이 꽃이 아름답게 피더니/ 今朝승得兩三葩:오늘 아침엔 두 세 송이 더 피어났네/ 開三開四至無數:세 송이 네 송이 끝없이 피어나면/畢竟幽廬恐太奢:끝내는 고요한 초가집이 화사해지겠지!

▲오평윤吳坪允:1910(일제강점기)~1951(분단시대), 본관은 군위, 오수병(吳壽柄)의 아들로 산북 오라리(오라위)에서 태어났다.

일본 공산당에 입당한 일이 탄로, 1933년 7월 28일 검거돼 이듬해 1월 26일 검사국으로 송치됐다. 1935년 10월 14일 오사카공소원(控訴院)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1937년 10월 20일 만기 출옥했다.

일본에서 영주하던 중 1951년 7월 28일 사망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오형吳瀅:생몰년 미상, 문인, 서당 훈장. 호는 도헌(陶軒), 본관은 군위.

성산읍 오조리(오졸-개)에서 태어났다. 박학능시(博學能詩)로 정평이 났으며 ‘계성사낙성(啓聖祠落成)’이란 한시가 현재 전해진다.

▲오화국吳化國:1914(일제강점기)~1966, 제주농업학교 학생의 제2차 항일 활동, 본관은 군위.

오두영(吳斗永)의 아들로 구좌읍 하도리(별방)에서 태어나 1930년 4월 제주농업학교 3학년을 졸업했다.

1931년 8월 10일 광주지법 제주지청에서 유죄 판결에 항소해 동년 10월 2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오화국(吳化國)은 징역 1년에 5년간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동기생 양치삼(梁致三·대림) 등 9명은 교장 관사에서 공공 기물을 부수었는데 도립 제주병원 원장 지바(千葉)가 이를 경찰에 알리자 구속됐다.

▲오흥태吳興泰:1700(숙종26)~?, 선비, 근왕병(勤王兵)을 일으킨 의사(義士), 본관 군위.

성산읍 난산리(난-미) 오전(吳巓)의 아들이다.

1728년(영조4) 이인좌(李麟佐), 정희량(鄭希亮) 등이 민란을 일으켜 나라를 어지럽히자 그는 정의현(㫌義縣)을 중심으로 창의격문(倡義激文)을 삼읍에 돌려 의병을 모았다. 마침 민란이 진압됐다는 소식이 전해져 의병을 해산했다.

이에 ‘오의사(吳義士)’라고 불렀다. 1771년(영조47)에 유배인 자의(諮議) 권진응(權震應)이 창의격문을 읽어보고 “강강불요(剛强不撓)한 문장의 요지는 참으로 뜻이 격절(激切)하다.”고 평했다.

1794년(정조18) 어사 심낙수(沈樂洙)가 내도, 오의사의 의거를 듣고 조정에 보고하니 정표(㫌表)됐다.

의귀리의 문사 고명학(高鳴鶴)은 ‘오의사여시(吳義士閭詩)’를 지었다. 이에 1850년(철종1) 봄에 제주목사 장인식(張寅植)이 정의서당 구내에 오흥태를 향사(享祀)하도록 의사묘(義士廟)를 건립, 애국심을 고취했다.

1871년 대원군의 ‘사원철폐령(祠院撤廢令)’에 의해 훼철, 창의격문은 ‘왕조실록’에도 등재돼 심금을 울려 주고 있다.

또 난산리 406번지 속칭 ‘곰베물’노변에 의사 ‘오흥태-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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