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지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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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옥선 수필가

해마다 마지막 날이 되면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이제는 연례행사가 된 새해맞이 준비를 하기 위해서다. 미리 사둔 다이어리를 펼치고 펜을 든다. 새날을 어떻게 보낼까 계획하기 전에 한 해를 어떻게 채웠는지 살펴보는 시간을 갖는다. 버킷리스트까지는 아니더라도 소망하는 것들과 잊지 말아야 할 일들, 그리고 결심을 적는다. 휴대전화기 속의 메모장이나 일정표에 간단하게 적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펜으로 적는 즐거움을 매해 고수한다. 이날을 위해 한 달 전부터 다이어리를 고르는 것도 거부하기 힘든 즐거움이다. 몇 해 전부터 한 가지 더해진 것은 사진을 정리하는 일이다.

새해가 되기 전날에 항상 사진을 정리해요.”

성당에서 만날 때마다 인사보다 미소가 먼저인 지인이 한 해에 한 번씩 잊지 않고 사진을 정리한다고 했다. 혹시 자신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면 남겨질 자녀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게 이유란다. 옷가지를 정리하는 것도 힘들 테지만 부모의 사진을 없애야 하는 수고로움을 남기고 싶지 않다는 지론이다. 사진이 짐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 없는 나로서는 그렇게까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해요?”

오랫동안 투병 중인 가족이 있는 지인은 나의 질문에 그저 웃기만 한다.

휴대전화기의 용량을 지나치게 많이 차지하고 있는 사진들을 정리한다. 한 장씩 지워나가다가 지난해 가족여행 중에 찍은 엄마의 사진 앞에서 한동안 머뭇거린다. 같은 장소에서 비슷해 보이는 수십 장의 사진 중에 조심스럽게 몇 장을 선택한다.

휴지통으로 이동할까요?”

네모난 화면 위로 무표정한 모습의 활자들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휴지통이라니, 참 멋도 없다. 나는 결정장애가 있는 사람처럼 휴지통으로 이동취소사이에서 고민한다. 저 사진에서는 활짝 웃고 있는 엄마가 있고, 다른 한 장은 바다를 보고 있는 모습이고, 또 다른 한 장은 물빛 하늘이 들어와 있고, 그 옆의 사진은 꽃으로 가득하다. 그 앞에서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과 꽃을 보고 있는 사진을 선택해 취소버튼을 누른다. 종이 사진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진들이 품고 있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늦여름 저녁 오랫동안 나를 사로잡았던 석양. 가슴 떨리던 순간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엄마, 이쪽으로 와 보세요

작은 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나를 부르는 소리도 들린다. 뭘 그렇게 자꾸 찍고 있느냐고 손사래를 치지만 싫지 않은 표정의 엄마와도 다시 만난다. 그날 함께 따뜻한 점심과 달콤한 카페라떼까지 자잘한 기억들까지 떠올라 저절로 웃음이 난다. 따뜻한 커피와 물 한 병이 든 배낭을 메고 숲길을 걷고 있는 남편의 사진에서는 삼나무의 향기가 나는 듯하다. 한 장의 사진을 선택할 때마다 마법처럼 그 순간의 이야기들이 재생된다는 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다.

사진을 지운다. 손바닥만 한 휴대전화기 속에 이렇게 많은 사진이 담겨 있었다니,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부터 올여름 나의 꽃밭을 가득 채워 가슴설레게 만든, 날마다 다른 색깔의 옷을 입는 도깨비를 닮은 수국. 한라산 둘레길에서 만난 붉은 단풍과 하늘, 그리고 작은 동박새 한 마리. 하나씩 들여다보다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담고 있는 사진을 한 장씩만 남기고 휴지통으로 이동시킨다. 부드러운 햇빛이 그려내는 선들과 바람의 방향과 나무가 만들어낸 그늘까지 이리저리 고민하다가 자리를 옮겨가며 찍은 사진들이 미세한 손끝의 움직임 하나로 단숨에 사라져버린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빗어 뒤로 넘기고 가지런히 묶은 뒤 의자에 앉는다.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다이어리를 펼쳐놓는다. 사진첩을 정리한 탓일까. 대청소를 막 끝낸 사람처럼 머릿속까지 정리가 된다. 신기하게도 소원하는 일들이, 기억해야 할 일들이 명료해진다.

이제 몇 시간 후면 새로운 해의 시작을 알리겠지. 나에게 주어질 날들을 채워나갈 이야기를 하나씩 적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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