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 동양화로 꽃피운 격조 높은 예술세계
(208) 동양화로 꽃피운 격조 높은 예술세계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우근민, 제주특별자치도지사 5선
 우성오, 도립의원 치과과장 역임
 원용덕, 일본에서 국권 회복 운동
 원용식, 최영사당 현판 휘호 작성
 원용혁, 일제강점기 민족주의 교육
 원용현, 추자 어민 항일 운동 참여
원용식의 ‘석난도’. 동양화가이자 서예가인 원용식은 산수, 사군자, 화조화를 잘 그렸으며 특히 잉어를 소재로 한 격조 높은 그림에 조예가 깊었다.
원용식의 ‘석난도’. 동양화가이자 서예가인 원용식은 산수, 사군자, 화조화를 잘 그렸으며 특히 잉어를 소재로 한 격조 높은 그림에 조예가 깊었다.

▲우근민禹瑾敏:생존, 구좌읍 종달리 출신, 제27대(1991년 8월 1일~1993년 3월 3일), 제28대 (1993년 3월 4일~1993년 12월 26일), 제32대(1998년 7월 1일~2002년 6월 30일), 제33대(2002년 7월 1일~2004년 4월 27일), 제36대(2010년 7월 1일~2014년 6월 30일) 제주특별자치도지사.

▲우성오禹聖伍:1926(일제강점기)~?, 제주도립 제주의원 치과과장, 치과의사.

대정면에서 대정면장(大靜面長)을 지낸 우영하(禹寧夏)의 아들로 태어나 뒤에 제주시 일도동으로 옮겨 1952년 9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 치과의사의 길에 들어섰다.

1956년부터 약 7년간에 걸쳐 제주도립 제주의원 치과과장에 재임했다.

1962년 10월 제주시에서 ‘서울치과의원’을 개업,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뤘다. 부인 김순선(金順善)과의 사이에 6남 1녀를 두었다.

▲원용덕元容德:1906(광무10)~?, 재일 교포, 어릴 때의 이름은 원용기(元容奇), 본관 원주.

추자면 별도(別島)의 대서리(큰-작지) 원태익(元泰益)의 4남이다.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東京)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통해 국권 회복을 기도했다.

1945년 해방돼 출옥, 1946년 재일교포의 권익 옹호를 위해 잡지 ‘민주조선’ 창간호를 발간했다.

1920년 큰 형 원용혁(元容赫)이 모슬포(모실-개)로 옮길 때 함께 따라와 광선의숙 학생으로서 공부했다.

같은 해 10월 조련(朝聯)에서 상임위원 16명을 뽑는데 제주인으로는 그와 김만유(金萬有·모슬포)가 선출됐다.

또 1948년 10월 조련 문교부책(文敎部責) 세 사람을 뽑을 때 원용덕도 뽑혔다.

모슬포의 광선의숙은 기독교 신자인 강규언(姜圭彦), 원용혁(元容赫), 정동규(鄭桐圭), 정을수(鄭乙洙) 등 민족주의자들에 의해서 운영되고 가르쳤기 때문에 항상 일제로부터 감시를 받았다.

1947년 9월 그가 지은 ‘조선 역사’를 조선문화사에서 간행해 동포들로 하여금 역사 인식을 갖게 했다.

1949년 6월 ‘조련’ 중앙 위원 43명을 선임할 때도 제주인으로서는 김민화(金民化·조천)와 두 사람만이 뽑혔다.

1950년 일본 정부로부터 조선인학교 폐쇄령이 내려지자 원용덕은 ‘민주조선’ 5월호에 ‘요시다(吉田) 정부에의 공개장’을 발표해 이 폐쇄령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원용식이 쓴 최영사당 글씨.
원용식이 쓴 최영사당 글씨.

▲원용식元容植:1898(광무2)~1927(일제강점기), 동양화가, 서예가, 호는 해주(海洲), 본관은 원주.

추자면 별도(別島)의 대서리(큰-작지)에서 원인상(元仁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19년 3월 제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했다. 추자도 출신으로는 제1호가 된다.

큰 뜻을 품어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우에노(上野)미술학교를 졸업했다.

원류를 공부하기 위해 중국 동북지방 봉천(奉天)으로 가 그곳에서 미술 활동을 인정받았다.

1925년 귀향해 최영장군 사당에 참배하려고 갔는데 마침 대보수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최영대장군신사(神社)라는 현판 휘호(揮毫)를 써서 게시해 오늘에 전한다. 내부의 벽화도 해주가 그렸다고 하나 더욱 확인할 필요가 있다.

서울 정릉(貞陵)에서 은거하면서 작품 생활에 몰두했다.

산수, 사군자(四君子), 화조화(花鳥畵)를 잘 그렸으며 특히 잉어를 소재로 한 격조 높은 그림을 잘 그렸다.

그의 작품은 퍽 드물어 제주민속개발에 작품 ‘설경’, ‘흑매(黑梅)’가 있으며 또 해주의 딸이 최근 서울에서 보관중인 2개의 작품은 희사를 받아 현재 제주교육박물관에 소장중이다.

▲원용혁元容赫:1890(고종27)~1950(분단시대), 광선의숙 교사, 기독교 장로, 본관은 원주.

원태익(元泰益)의 장남으로 추자(楸子)면 별도(別島)의 대서리(큰-작지)에서 태어났다. 원적은 전남 강진군 남성(南城)리이다.

특히 그는 민족주의적이며 기독교 계열에서 운영하던 광선의숙(光鮮義塾)의 교사로 재임하면서 경영에도 참여했다.

이 의숙은 윤식명(尹植明) 목사가 기독교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설립된 학교로서 강규언(姜圭彦), 정동규(鄭桐圭), 정을수(鄭乙洙), 원용혁(元容赫) 등 기독교인들이 교사로 재직했다.

항일 민족주의 교육의 온상지라 해서 일제의 감시와 간섭이 심해 1930년경 전남 강진군으로 옮겼다.

1932년 강진에서 야학(夜學)을 경영하면서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 숙장은 원용혁, 보모(褓母)는 정현숙(鄭賢淑)이 담당했다.

동년 10월 그는 일제 당국에 의해 검거돼 조사를 받았다. 이 의숙은 강진교회가 유지 후원단체로 수년간 경영해 왔는데 항일적인 학교로 지목받았다. 이로 말미암아 형제들은 뿔뿔이 헤어졌다.

바로 밑의 아우 원용현(元容賢)은 추자도에서 어업에 종사하던 중 1932년 5월 일본인 유자망 어업으로 어족이 고갈되자 생존권 차원에서 항쟁에 동참했다. 이때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체포당해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의 언도를 받았다.

또 아우 원용덕(元容德·원용기)은 모슬포의 광선의숙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항일운동으로 일관했다.

▲원용현元容賢:1883(고종20)~?, 추자도 어민의 항일 활동.

그는 추자면 별도(別島)의 대서리(큰-작지)에서 태어났다.

일제의 관리들과 일본 거류민(居留民)들이 결탁해 추자 도민의 생존권을 위협할 정도로 불법 어로를 자행했다.

이에 저항했더니 마구 체포해 1932년 7월 8일 광주지법 제주지청에서 김봉수와 박병석에게는 소위 소요죄로 각각 징역 7월을, 또 나머지 11명에게는 각각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그에게는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