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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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명숙 수필가

봄부터 지율이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키고 도서관으로 향한다. 햇살이 부드러운 날은 집으로 곧장 귀가하기엔 아쉬워서다. 산책하다 등나무 앞에서 발길이 멈췄다. 칡덩굴은 오른쪽, 등나무는 왼쪽으로 감고 올라간다고 하여 우갈 좌등’. 찬찬히 들여다보니 이 나무들도 순리를 따르고 있어 오묘하다.

나무의 줄기처럼 각자 바라는 방향으로 벋어가는 속성을 보면 우리 내외의 다른 성향을 보는 듯하다.

우리는 왜 부부가 되었을까.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나이에 비해 듬쑥함에 끌려 배우자로 선택했으나 맞지 않는 게 여럿 있다. 나 역시 고쳐지지 않는 고질 병 하나가 버리지 못하는 성격이다.

등꽃이 한창 일 때는 부부의 가장 단란한 시기였다. 큰애가 일곱 살 둘째가 다섯 살, 그 시절에는 온가족이 한라산 중턱에 도시락을 싸고 다니며 자연을 교감하고 등꽃이 피듯 우애도 깊었지 싶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맞는 걸까. 나는 입었던 옷이 정이가고 편안하다. 새 옷은 어딘가 낯설고 익숙해지려면 긴 시간을 요한다.

20여 년 전 일이다. 외출 후 귀가했더니 낯익은 침대가 보이지 않았다. 그이에게 자초지종 들어보니 지인에게 건넸단다. 애들이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시기까지 시간과 정()이 스며있는 물건을 일언반구도 없이 쉽게 넘기다니. 한마디 상의라도 했으면 덜 서운했지 싶다.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것도 집착일까. 애들이 초등학교 시절의 교과서, 일기장 등을 보관하고 있다. 막내가 유치원 때 사용했던 책상을 지금은 손녀들이 오면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곤 한다. “추억도 있고 손녀들 놀고 좋지예?” 남편은 아무 말이 없다.

어느 가을, 남편의 고동색 양복이 보이지 않았다. 그 옷을 입을 때면 어울려서 보기에 좋았는데, 행방을 알아보니, 오래 입어 따뜻하지 않아서 버렸단다. 덧정이 갔던 옷이었는데, 어떻게 쉽게 버릴 수 있지?

언젠가 나도 마음의 결심을 하고 입지 않는 옷을 버리려고 클린하우스로 향했다가 되가져온 적이 있다. 우리 내외는 이렇듯 가치관이 다른데도 등나무의 버팀목처럼 기대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을 보면 알 수 없는 일이다.

부부란 무엇인가. 등나무처럼 왼쪽으로 작동하려는 그이, 오른쪽을 고수하는 나. 그 이치는 뭘까. 깊은 뿌리. 보이지 않는 원리는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갈등이란 실타래를 풀어가는 것이 내외의 영원한 숙제이던가. ‘한 인간의 성격은 그의 운명이라고 한 헤라클레이토스 말처럼 성격은 정녕 변화 할 수는 없는 것인가.

습관처럼 그 나무 앞에 서성인다. 나목(裸木)은 굵어지고 비바람 앞에서도 꿋꿋하게 서있기까지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구분 짓고 때론 보듬었던 시간들. 그물코 같은 나뭇가지 사이로 세월의 더께가 흐른다.

본체의 투박한 수피가 남편의 검버섯이 새겨진 손등처럼 터슬터슬하다. 가득 피워냈던 잎들은 떨구었으나 줄기는 화석처럼 단단하다. 동아줄처럼 동무한 형상이 우주를 이룬다.

그이는 나에게 어떠한 존재인가. 겨울의 끝자락, 민낯인 나무와 재회했다. 얼굴에 스치는 거센 바람도 잊은 채 한동안 그 나무를 감싸 안았다. 등나무는 구원자다. 나의 닫힌 마음을 열어주고 포용하기에.

순한 부부가 이럴까. 서로가 옳다는 틈 있는 내외가 이런가. 잠시 숨을 고른다. 등나무 너머로 한줄기 말씀이 들려오는 듯하다.

번뇌에서 벗어나, 방하착(放下着)하라!

방하착=‘내려놓아라’, 무소유를 의미하는 불교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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