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자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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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이환 수필가

어머니에게 자식으로 태어나, 내리사랑만을 받을 줄 알았지, 한 번도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 헤어날 길 없는 죄책감, 내 어찌 다 용서받으랴.

오늘따라 왠지 몸이 개운치 않다. 먹구름에 가려 햇빛 한줄기조차 보이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 몸이 기상청이라더니 한바탕 비바람이라도 몰아칠 모양인가?

애야

, 어머니

줄을 단단히 묶어라

곧 태풍이 몰려온다는 소식에 어머니와 나는 지붕에 매달렸다. 바람에 날릴 것을 염려해서다. 집줄로 얼기설기 엮어 매었다. 그 날밤, 아니나 다를까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비바람이 몰아치더니, 밤새도록 돌담이라도 무너뜨릴 듯 거친 돌풍은 비를 쏟으며 초가집을 마구 뒤흔들었다. 마치 누군가 이 움막 같은 초가를 양손으로 움켜쥐고 내동댕이칠 것만 같았다.

4·3사건은 갓 서른을 넘은 여인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이어서 닥친 보릿고개. 네 남매를 홀로 키우는 어머니.

어머니는 밀주密酒를 몰래 만들어 팔기도 했었다. 통행하는 사람을 일일이 검문하던 때다. 밀주를 성안에 들어가 판다는 것은 위험하면서도 힘든 일이었다.

나는 TV 프로그램 중에서 환경스페셜을 좋아한다. 자연환경에 적응해가며 살아가는 생생한 삶의 진실과 만나게 되리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신년 특집 환경스페셜 <제주 오소리>를 보았다. 오소리 가족이 위험에 처했을 때 그 어미가 어떻게 처신하는가를 보여준 감동의 기록이었다.

어미라는 존재가 갖는 불가사의한 힘. 자연을 한갓 재물로 바라보는 인간의 욕심에 안타까움도 컸지만, 나는 한시도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뱅작竝作.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농사를 지어야 한다. 턱없이 부족한 땅. 반뱅작이라도 하려면 평소 허드렛일을 도와주며 지주地主에게 잘 보여야 했다. 어렵사리 빌린 밭에 어머니 혼자 힘으로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검질을 메고, 타작하고, 하는 일련의 과정은 그야말로 눈물겨운 삶의 연속이었다.

연자 어머니. 동네 사람들은 어머니를 이렇게 불렀다. 큰누나 이름이 연자여서 나는 크면서 연자 어머니 아들로 자랐다.

어머니는 아침이슬 맞으며 밭에 가서, 해가 질 때쯤이면 돌아왔다. 지천으로 널려 있는 돌, 시도 때도 없이 불어대는 바람, 어머니에게 돌과 바람은 삶의 일부가 아니라 삶 그 자체였다.

오늘은 놉을 빌어서 김매려 가는 날.

점심시간이 지날 무렵 밭에 가보니, 저만치 동네 어머니들이 파란 풀잎 사이에 나란히 앉아 김을 매고 있다. 허리를 펴기 위해서인가,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하늘을 향해 호오이~’하며 깊은숨을 내쉰다. 어머니는 가끔 홀로 돌아앉아 긴 한숨을 쉬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소리가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원망의 소리,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통곡처럼 들렸다.

새해 정월 열나흘에는 어머니는 어김없이 출가한 연자 누님과 함께 노늘당을 찾았다. 한 해 운수도 알아보고, 가정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기 위함이었다. 당에 다녀온 날 어머니 표정은 늘 평온했다. 나쁜 기운을 방쉬만 잘하면, 올 한해 액운은 없으리라는 무당의 말을 신봉했기 때문이리라.

요양원에 입소하기 몇 해 전, 어머니의 방에 장롱 하나를 들여놓아 드렸더니, 하루에 서너 번도 더 정갈하게 정리해 놓는다. 꼭 어디 여행이라도 가는 것 같다.

뭐 햄수과?”

눈길은 여전히 옷감에 둔 채 바삐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는,

내가 입을 수의 하며, 친족들이 입을 호상 등을 장만해 두었져.”

외딴 섬 제주에서 어미라는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의 공통점인가.

연자 어머니는 아흔여섯 해 동안 정말 검소하게 자식들만을 위해서 살다가 홀연히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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