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 현감은 도망쳤지만 선비는 남아 고향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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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일개, 1932년 어업조합 착취에 맞서 생존권 투쟁하다가 체포돼
 원정미, 재일교포 동화작가로 전국학교도서관협의회 도서상 수상
 원희룡, 검사 등 거쳐 제16대 총선 통해 국회 입성…前 제주도지사
 유명록, 안덕면 사계리 출신…1840년 영국 군함 침입에 맞서 항거
 유신출, 일본 와카야마서 항일 운동…광복 이후 건준위 등서 활동
 윤석원, 사회주의 항일 조직 활동…동아일보 제주지국 기자 생활
유명록은 1840년 12월 영국 군함 2척이 가파도와 모슬포에 침입하자 포의로서 의병을 모집, 결사대를 조직해 적군이 퇴거할 때까지 항거했다. 사진은 한때 영국 군함이 내박했던 모슬포의 1960년대 모습.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유명록은 1840년 12월 영국 군함 2척이 가파도와 모슬포에 침입하자 포의로서 의병을 모집, 결사대를 조직해 적군이 퇴거할 때까지 항거했다. 사진은 한때 영국 군함이 내박했던 모슬포의 1960년대 모습.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원일개元一凱:1883(고종20)~?, 추자도 어민의 항일 활동.

추자면 대서리(당-구미 혹은 큰-작지)에서 태어났다.

1926년 5월에 관제 오용화(御用化)된 어업조합의 착취와 횡포에 항일 운동이 일어났다. 1932년 김봉수(35)와 박병석(34)은 주민들과 함께 생존권 투쟁을 전개하다가 체포돼 1932년 7월 8일 광주지법 제주지청에서 소위 소요죄로 각각 징역 7월을 선고받았다. 원일개에게는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원정미元靜美:1944(일제강점기)~?, 재일교포 동화작가, 본관 원주.

‘제주-성안’ 일도1동에서 태어나 5세 때 어버이를 따라 일본 도쿄(東京)도(都)에 정착했다. 문화(文化)복장학원 제주교포 부현수(夫賢壽)와 결혼, 프로재단 스쿨과 아동문학 스쿨을 수료했다.

아동문학과 의상(衣裳)디자인을 봉합하는 연구에 몰입, 이어 개인전(個人展)과 패션쇼를 개최한 바 있다.

저서 동화(童話) ‘학교의 바람’, ‘할머니의 이야기’, 전국학교도서관협의회 선정한 도서상(圖書賞)을 받았다.

▲원희룡元喜龍:생존, 서귀포시 중문동 출신, 제주제일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공법학과 졸업.

학력고사 전국 수석, 사법시험 수석 등 ‘수석’이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다닌다.

검사, 변호사 생활을 거쳐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서울 양천갑)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해 국회에 입성한 뒤 내리 3선을 했다.

소장파 정치인 모임을 결성하는 등 여권 내 개혁파의 상징으로 한나라당 사무총장, 최고위원, 제주특별자치도지사 등을 지냈다.

 

 

 

 

▲유명록柳命祿:생몰년 미상, 의인(義人), 본관 문화.

안덕면 사계리(거문-질)에서 태어났다.

1840년(헌종6) 12월 영국 군함 2척이 대정경(大靜境) 가파도(겔파-섬)와 모슬포(모실-개)에 내박(來泊), 이들 40여 명은 산악을 흔들었다.

대정현감이 겁이 나서 현성(縣城)을 빠져나가 도주했으나 그는 포의(布衣)로서 의병을 모집, 결사대를 조직하더니 영국 군함이 퇴거함을 듣고서야 의거(義擧)를 멈추었다.

후일 호남의 거유(巨儒)인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이 이를 듣고 그의 격문 뒤에 “三百州而皆大靜縣風氣: 이 나라 3백주가 모두 대정의 기풍이 되고 千萬人皆柳命祿瞻力: 천만 사람이 모두 유명록의 담력이라면 則雖有百洋 奈吾何!: 여러 서양인인들 어쩌랴! 此時此卷隱 漆夜一星火: 이때 이 창의 격문은 어두운 밤하늘의 별빛이라. 陸地人 當死矣.: 육지 사람들은 무엇을 하나 죽어 마땅하다. 柳生忠家之來 嘆息而題其卷尾 以歸之.: 유씨는 충성스러운 가문에서 태어났으니(육지인은 그렇지 못함을) 탄식하노라! 격문 끝에 이 글을 써서 들어가게 하노라.” 라고 썼다.

이는 1845년(헌종11)에 가파도에 표착한 사마랑(Samarang)호(선장: 해군 대령 벨처)가 우도에 상륙한 것보다 5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이때의 제주목사는 구재룡(具載龍)이었다.

▲유신출柳辛出:1912(일제강점기)~1948(미군정기), 일본 와카야마(和歌山)에서 전협(全協)의 항일 활동.

본관 문화, 유달삼(柳達三)의 아들, 대정읍 인성리(대정-골)에서 태어났다.

조국이 광복돼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에서 활동, 1947년 3·1절 시위로 동년 8월 21일 미 군정청(軍政廳) 포고령 제2호 위반으로 한때 구금됐다.

일본으로 건너가 토목공으로 종사했다. 1931년 6월 전협(全協: 일본공산당 외곽 단체) 섬유노조에 가입하고 동년 8월 중순 전협 와카야마(和歌山) 지구의 조직원으로 항일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섬유 노조 간사이(關西)지부준비회의 김제곤(金濟崑)이 1934년 간사이지부 책임자가 되자 유신출은 김제곤의 지도를 받으며 와카야마의 조직재건에 노력하는 동시에 기관지 ‘섬유 노동 간사이판’을 간행하는 등의 활동을 하던 중 체포당했다.

1934년 10월 26일 오사카(大阪)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후손(後孫)들은 1965년 10월 전라남도 무안군 삼향(三鄕)면 용포(龍浦)리 208번지로 이적移籍했다.

▲윤석원尹錫沅:1907(융희1)~?, 고려공청(共靑)의 항일 활동, 본관은 해남.

윤계홍(尹桂弘)의 아들로 이도리(제주-성안)에서 태어나 1922년 추자면 묵리(무기)의 윤주홍(尹柱弘)의 양자로 입양된 후 교장 김시진(金時晋)의 딸 김병랑(金炳娘)과 결혼했다.

1930년 경성지법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1931년 8월에 출옥했다.

1932년 3월에 체포된 후 1933년 2월 28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2년 6월형을, 동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무죄를 언도받았다.

1946년 2월 서울에서의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 대회에 전남 대표로 참석했다.

일제 말기 일경에 쫓길 때 제주·추자·목포·광주 등지로 거주지를 자주 이동했다. 서울로 유학, 중동(中東)학교를 2년 수료했다.

1921년에 조직된 반역자구락부(叛逆者俱樂部)를 발전시켜 1925년 9월에 결성된 제주청년연합회에 가입했다. 1925년 11월 23일 사회주의 연구를 표방하는 경성학생연맹이 결성될 때 그는 창립 멤버 20명 중의 한 사람이다.

이 멤버에 제주 출신 유학생으로서 박찬식(朴燦式), 김정로(金正魯) 등이 가담했는데 이 단체는 사회과학 연구를 표방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계몽하는 비밀 학생단체였다.

그는 귀향한 후 1925년 사상단체 신인회(新人會) 창립 멤버로 활동했다.

동아일보 제주지국 기자로 활동하면서 송종현(宋鍾炫·신촌)의 권유로 1927년 공산당에 입당, 동년 7월 고려공산청년회 소속으로 제주도 야체이카에 배속됐다.

1928년 2월 제주공립보통학교(현 제북교)의 맹휴(盟休)사건이 발생, 그 배후 인물로 지목받았다.

1928년 제주청년동맹 집행 위원에 당선, 제4차 조선공산당에 관련된 김택수, 송종현, 강창보와 고려공청원 김정로, 윤석원 등이 구금됐다.

그는 1928년 9월 25일 일경에 체포, 당시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결성하는데 전남 대표 42명이 광주에 모인 때에 제주 사람으로는 윤석원과 좌혁상左赫相(신도) 2명뿐이었다.

동년 9월 조선공산당 전남도당 준비위원회 선전부장으로 당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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