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바다 귀향길 밝히던 생명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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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지명 유래·도대불
제주에만 남아있는 옛 등대 ‘도대불’…문화재로 등록
80여 종 식물들 자생…천연기념물·세계지질공원 선정
제주 맥 끊은 호종단 귀국 막았다는 전설서 지명 유래 
자구내 포구에 있는 옛 등대인 ‘도대불’과 또다른 명물인 ‘자구내 오징어’가 길게 걸려 있는 모습. 도대불은 제주에만 남아있는 옛 등대로 현대식 등대가 도입되기 전에 항구 위치를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자구내 포구에 있는 옛 등대인 ‘도대불’과 또다른 명물인 ‘자구내 오징어’가 길게 걸려 있는 모습. 도대불은 제주에만 남아있는 옛 등대로 현대식 등대가 도입되기 전에 항구 위치를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천연기념물 보호구역인 차귀도

2000년에 천연기념물(제422호)로, 2010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선정된 자그마한 섬 차귀도로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 죽도·와도·지실이섬 등 세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차귀도에는 아름다운 경관뿐만 아니라 역사문화도 가득하다.

가장 큰 섬인 죽도는 동서 길이가 850m, 남북이 300m이고, 사면이 석벽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지형이다. 해안과 가장 가까이 있는 섬은 사람이 누운 모습과 같다 하여 눈섬(와도), 서북쪽 섬은 감자를 쪼개 엎어 놓은 것과 같다 하여 지실이섬 또는 독수리 모양과 닮았다고 하여 매바위로도 불린다.

임진왜란 전후 왜구가 침범했던 차귀도는 오랫동안 무인도로 남아있었다. 1911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다가 다시 무인도가 된 것은 간첩사건 때문이다.

1974년 무장간첩 3명이 추자도에 잠입하고, 추적 과정에서 추자도민 4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차귀도를 포함한 외딴 섬에 사는 주민들에게 섬에서의 퇴거 명령이 내려졌다. 2011년 다시 개방된 차귀도에는 오래전 사람이 살았던 집터와 샘터 등도 남아있으며, 특히 1957년 세워진 무인등대가 바닷길을 안내하고 있다.

차귀도 주변 해역은 쿠로시오 해류의 영향으로 다양하고 희귀한 어종이 많이 서식하고 있으며, 동식물이 많은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러한 환경적 가치로 인해 차귀도 연안은 국가지정 문화재인 천연기념물 보호구역이 되었다.

80종이 넘는 식물들이 자생하고 있는 차귀도에는 제주에서도 보기 드문 ‘해녀콩’도 보인다. 바닷가 주변에서만 자라는 희귀식물인 해녀콩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굳건하게 바다와 가족을 지켜온 제주해녀의 삶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차귀도 세 개의 섬 중 하나인 눈섬. 사람이 누운 모습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차귀도 세 개의 섬 중 하나인 눈섬. 사람이 누운 모습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차귀(遮歸)도 지명 유래와 실재인물 호종단

차귀도 지명은 호종단의 전설에서 비롯된다. 제주에서 자주 회자되는 호종단의 전설을 통해 제주선인들의 기원이나 바람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실재인물 호종단과 차귀도에 얽힌 전설을 들여다보자.

오래전 송나라에서는 중국을 호령할 큰 인물이 제주에서 태어난다는 예언이 돌아 민심이 흉흉한 상태였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풍수지리에 능한 호종단에게 제주섬의 이름난 지맥과 수맥을 끊으라고 급파했다.

종달리로 입도한 호종단은 제주 도처의 지맥과 수맥을 찾아 해코지하며 산방산 아래에 다다랐다. 그곳에서 승천하려는 와룡의 지혈을 찾은 호종단 일행이 예리한 무쇠침으로 용의 가슴임 직한 곳을 마구 파헤쳤다. 그러자 시뻘건 피가 솟아올라 사방으로 흩어지고, 승천을 기다리던 와룡은 화산과 같은 피를 토하며 명을 마쳤다. 그러자 솟구치던 피가 원혼을 간직하려는 듯 바위로 굳어져 지금의 안덕면 사계리 바닷가의 용머리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뒤늦게 이를 안 한라산 수호신이 매로 변하여 날아가 돌풍을 일게 하니, 자구내 포구를 통하여 돌아가려는 호종단 일행이 탄 배가 파선되어 수장되기에 이르렀다.

제주선인들은 한라산 수호신이 호종단의 귀국을 막았다고 하여, 자구내 앞의 섬을 막을 차(遮), 돌아갈 귀(歸)를 넣어 차귀도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1452년 편찬된 고려사절요에는 호종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호종단은 송나라 복주 사람으로 유학을 공부한 지식인이었다. 유람하던 중 고려에 귀화했는데, 박학하고 문장에 능하여 고려왕 예종의 총애를 받아 주요 관직을 맡았다. 압승술을 부릴 줄 아는 그를 왕은 총애했으나, 관리들은 왕을 현혹시킨다며 싫어했다.’

압승술은 당시 유행했던 도교의 한 방술이다. 호종단을 등용했던 고려 예종은 도교에 심취해 우리나라 최초의 도교사원인 복원궁(福源宮)을 건립했다고 전한다.

가뭄이 극심할 때 비가 오도록 기우제를 지내거나 나쁜 재앙을 물리치도록 요술을 걸거나 명소를 누르는 행위 등이 압승술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조선의 명당에 쇠말뚝을 박은 것도 압승술의 일종이다.

제주설화에 적지 않게 등장하는 호종단은 헌마공신 김만일 증조부의 묘 자리를 봐주었다는 좋은 의미의 전설도 내려온다.

자구내를 차귀천(빨간 원 안)으로 표기한 제주삼현도.
자구내를 차귀천(빨간 원 안)으로 표기한 제주삼현도.

▲차귀도 등대와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자구내 도대불(등명대) 주변 풍경

차귀도 본섬 죽도에는 특이한 지명인 볼래기(여) 언덕이 있고, 언덕 정상에는 무인등대가 있다. 등대 주변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사람들의 넋을 홀릴 만큼 눈부시고 아름답다.

1957년 불을 밝힌 볼래기여 언덕에 있는 등대는 고산리 주민들과 차귀도 주민들이 등짐으로 돌과 자재들을 지어 나르며 만들었다.

볼래기(여)란 지명은 밀물 때는 물에 잠기고 썰물 때는 나타나는 본섬 여(礖) 주변 해역에 볼래기(볼락)라는 어류가 많은 데서, 등대를 구축하려 등짐을 진 주민들이 동산을 오르려 숨을 볼락볼락 헐떡인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차귀도에 등대가 설치되기 훨씬 이전에도 마을에서는 자구내 포구에 현무암 돌로 도대불을 지어 밤에도 불을 밝혔다. 도대불은 제주에만 남아있는 옛 등대로, 현대식 등대가 도입되기 전에 항구 위치를 알려주는 역할을 하였다.

2021년 원형을 잘 간직한 것으로 평가되는 이곳 등명대를 비롯한 6기(고산리·김녕리·북촌리·영일동·대포동·보목동)가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포구마다 어민들이 생계를 위해 자발적으로 만든 등명대인 도대불은 제주도 어민들의 삶과 애환이 깃든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도대불을 밝히는 연료로는 상어의 간에서 짠 기름과 고등어 등 각종 생선의 내장을 썩힌 후 끓여서 만든 기름을 주로 사용했다. 가장 먼저 조업을 나가는 어부가 도대불에 불을 밝히고 가장 늦게 들어오는 어부가 불을 껐다. 돌로 만들었다 해서 또는 돛대처럼 높은 곳에서 항구의 위치를 알려준다고 해서 도대불이란 이름이 붙여졌단다.

도대불 이전의 시절에는 갯불이 등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어부의 아낙들이 남편이 탄 배가 안전하게 개(포구)로 돌아올 수 있도록 횃불을 들고 마중을 나간 데서 유래하여 갯불이라 불렸다 한다.

최근 자구내 포구의 또 하나의 새로운 명물은 오징어를 말리는 진풍경이다. ‘울릉도 오징어’라는 옛말 대신에 ‘자구내 오징어’라는 말이 새롭게 회자되고 있다. 지금은 제주도가 우리나라 오징어 어획량의 1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차귀도 주변 해역에서는 오징어보다 다리가 조금 짧은 한치가 많이 잡힌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서는 1950년 전후하여 한라산 영실에서 발원한 큰 물줄기인 자구내 물을 이용하여 논밭 등 관개시설을 구축하여, 자구내 주변에서 대단위 논농사를 짓기도 했었다.

18세기 중반에 편찬된 제주삼현도 등을 포함한 여러 고지도에는 큰 물줄기인 자구내를 차귀천으로 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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