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정리 중
아직도 정리 중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차영주 수필가

방 벽면이 온통 책으로 가려져 있다. 천장까지 다다르고 있어 어쩌다 책 한 권 꺼내려면 진땀을 뺀다.

손대면 하루에 될까 싶어 자꾸 미루기만 하다가 질끈 머리를 동여맸다. 어쩌면 그와 한바탕 설전을 치를 수도 있지만 잘 넘어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티끌 모아 태산이란 말처럼 하나씩 샀던 책이 더미를 이룬다. 대부분 남편의 것들이다. 나도 좀처럼 책을 잘 버리지 못하는데 그는 유독 더하다.

20년이 넘도록 자리만 차지하고 누렇게 색바랜 책들도 마냥 둘 것 같다. 좀 버릴까? 못 들은 척 대답하지 않는다. 짐작대로 그의 심사가 불편해 보이지만 외면하고 책 정리를 강행했다.

익숙한 작가의 이름에 내려놨다 올리기를 거듭하다 내동댕이쳤다. 시리즈로 나란히 있던 것도 망설이다가 뽑아냈다. 두툼한 책은 쓱 훑어보며 혹 숨겨놓은 돈이라도?’ 얄팍한 망상이 끼어들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밑줄 하나 없이 깨끗해 읽기나 했을까 싶은 것들도 있었다.

색이 바래고 글자도 작아 다시 볼 것 같지 않은 것들을 골라내다 보니 거의 남편 책들이다. 에고, 너무 골라냈나? 요즘 따라 이유 없이 자꾸만 툭툭거리던 내가 그의 책에 화풀이하는 꼴이 참 우습다.

지금 선택권은 나에게 있다. 아들, 딸이 사서 보던 책은 나도 보고 싶은 것들이라 차곡차곡 정리했다. 내가 샀던 책들도 모두 그대로 두었다.

어렵게 모은 돈으로 샀던 생각에 버릴 수가 없었다. 심지어 내가 고등학교 때 공부했던 교과서도 한 권 있다. 그 시절의 꽃 같은 추억을 간직하고 싶었다.

남편의 침묵시위가 이어졌다. 방 한쪽에 모아놓은 책들을 보고 언짢은 속내를 묵묵부답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맘대로 책들을 버리려 해서 미안하다고 해도 시큰둥하다.

두고 싶은 책이 있으면 골라내요.”

그는 대꾸는커녕 눈도 마주치지 않고 밥만 먹었다. 슬쩍 눈치를 보며 말을 아끼자니 속은 더부룩하고 뒷머리가 묵직해졌다.

그가 한창 책을 사보던 때는 직장생활의 전성기였다. 직원들과 아픔을 함께 나누고 노사 갈등도 순조롭게 풀어나가면서 승승장구했다. 이제 퇴직하고는 점점 심신이 나약해진 그가 갈 곳과 있을 곳도 머뭇거리는 마음일 것을 나도 안다. 전화기에 연락처도 하나씩 지우고 그를 찾는 벨 소리도 뜸하다.

전에 다쳤던 발목이 부실하여 고작 동네 한 바퀴 걷는 것이 운동이다. 재미도 없고 세월의 때만 묻어가는 책처럼 누군가 찾지도 않고 찾아가지도 않으며 안방을 지키고 있다. 마치 빛바래고 먼지가 내려앉은 저 책장의 낡은 책들처럼.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이틀이 지나고 다시 한번 말코를 텄다.

어떻게 할까?”

버려!!”

마지못해 내뱉는 외마디 소리에 주춤했지만 엎드려 절받기라도 명분을 얻었으니 숨소리도 줄였다. ‘수고했다고는 못할망정.’ 야속한 생각이 들었지만 여태 혼자 북을 치고 장구도 치며 살지 않았던가. 남편의 취향이 돋보이는 책들을 골라서 도로 책장에 꽂아놓고 이 남자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나머지 책들을 밖으로 내놓았다. 300권 넘는 책이 무심하던 주인을 떠나게 되었다.

언젠가 남겨진 내 책들도 버려질 날이 오겠지만 아직은 책장에 두고 싶다. 소싯적 꿈을 꾸었을 때, 글 한 편 쓰고 싶을 때, 아이들 생각날 때, 책장 앞에 서서 한참을 보고 있으면 눈물이 나곤 했다. 책장을 넘기다 밑줄 친 이야기를 곱씹어보며 고개를 끄떡이기도 했다. 본의 아니게 내 서재가 된 듯해 그에게 미안해진다. 그도 책장의 책들로 위안을 얻고 있을지도 모를 일인데. 지금도 그는 심기가 불편한지 양미간을 찌푸리고 있다. 이제, 그가 좋아하는 삼계탕을 준비해야겠다. 인삼과 전복을 듬뿍 넣고.

수십 년 함께 살며 잃어버린 기억들이 잠자는 책장은 아직도 정리 중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