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된 섬사람들의 염원이 바다 위 우뚝
고립된 섬사람들의 염원이 바다 위 우뚝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119) 오백장군 막내바위·당산봉
설문대할망의 막내 아들이 굳어져 생겼다는 오백장군 바위
곤궁한 생활·출세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 깃든 전설
차귀진성 지키던 당산봉…응회암으로 이어진 오솔길이 일품
차귀도 주변에 있는 오백장군 막내바위. 설문대할망의 막내 아들이 바위로 굳어진 것이라는 설화가 전해진다. 능력 있는 사람들이 큰 인물로 성장하지 못하는 섬사람들의 아쉬움과 열심히 일을 해도 곤궁한 삶을 벗어나기 힘든 현실에 대한 자기 위안이 설화에 깃들어 있다.
차귀도 주변에 있는 오백장군 막내바위. 설문대할망의 막내 아들이 바위로 굳어진 것이라는 설화가 전해진다. 능력 있는 사람들이 큰 인물로 성장하지 못하는 섬사람들의 아쉬움과 열심히 일을 해도 곤궁한 삶을 벗어나기 힘든 현실에 대한 자기 위안이 설화에 깃들어 있다.

▲분화구에서 솟아오른 오백장군 막내바위

차귀도는 제주도에서도 화산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차귀도 전망대 있는 서북쪽 해안은 송이동산으로도 불린다. 가볍고 붉은 화산재인 송이는 격렬한 화산활동의 증거이다.

차귀도 주변에 4~6개의 분화구가 바닷속에 잠겨있어, 단위 면적당 화산 분화구가 가장 많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특이한 지형을 지키듯 우뚝 서 있는 현무암 바위가 오백장군 막내바위이다. 용암이 뿜어져 나오는 통로인 화도를 따라 분출하던 마그마가 그대로 굳어져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바로 이곳이 수월봉과 차귀도 사이에 형성된 분화구의 중심지이다. 송이동산 근처 해변에 우뚝 솟은 장군바위는, 한라산 영실에 있는 설문대할망의 아들들인 오백장군의 막내가 바위로 굳어진 것이라는 설화가 전해온다.

제주창조의 여신인 거녀 설문대할망은 설문대하르방을 만나 낳은 오백장군 아들들을 먹일 죽을 쑤다가 펄펄 끓던 솥에 빠져 죽었다. 사냥에서 돌아온 형제들이 먹은 것은 어머니의 피와 살로 쑨 죽이지만, 막내가 본 것은 어머니의 유골이었다. 어머니의 피와 살로 쑨 죽을 먹은 형들과 같이 있지 못하겠다며, 막내는 그 먼 길을 실성한 심정으로 걷다가 섬 끝 지점인 이곳에서 바위가 되었다. 나머지 형제들도 비통한 심정을 가누지 못해 영실 도처에 떨어져 바위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제주민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야기일 것이다.

▲차귀도에서 엿보는 설문대할망의 유훈

차귀도 근해에서 솟아오른 바위를 보고 오백장군의 막내를 떠올린 제주선인들의 애절함과 상상력에 머리가 숙여진다.

오백장군 전설에는 능력 있는 사람들이 큰 인물로 성장하지 못하는 섬사람들의 아쉬움과, 토지가 척박해 열심히 일을 해도 곤궁한 삶을 벗어나기 힘든 현실에 대한 자기 위안도 깃들어 있는 듯하다.

신화와 전설 속에는 재미와 교훈이 담겨져 있다. 이를 속옷 한 벌을 만들어주면 제주도와 육지를 잇는 다리를 놓아주겠다고 한 설문대할망의 전설 속에서 찾아보자.

속옷을 만드는데 명주 100통이 있어야 함에도 99통밖에 구하지 못한 섬사람들은, 부지런히 옷감을 구했으나 결국 할망의 속옷을 만들지 못했다.

이러한 운명의 장난으로 제주섬은 육지와 이어지질 못했다. 육지에서 고립된 섬 백성들은 이에 대한 짙은 아쉬움과 함께 떨어져 사는 이유를 전설이나 신화 속에서 찾아내 스스로를 위로하려 했음이다.

설문대할망 신화를 통해 섬사람들이 이루고자 한 꿈은 무엇일까. 명주 한 필이 모자라서 육지까지 다리를 놓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실망감을 언젠가는 이뤄보고자 하는 꿈을 꾸며 섬사람들은 살아오지 않았을까.

당산봉에서 바라본 수월봉. 당산봉 정상 주변은 지평선과 수평선을 볼 수 있는 전망 좋은 자리다.
당산봉에서 바라본 수월봉. 당산봉 정상 주변은 지평선과 수평선을 볼 수 있는 전망 좋은 자리다.

▲차귀진성 길목 역할을 하던 당산봉

제주의 9진 중 차귀진성이 위치했던 이 지역은 25봉수인 당산봉수와 38연대인 우두연대(牛頭烟臺)가 위치했던 것으로 보아 무인도였던 차귀도와 제주도 관문 중 하나인 차귀진성을 지키는 중요한 길목으로, 왜구 방어를 위한 매우 중요한 군사기지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당산봉 기슭에 있었던 차귀당에서 국가적 차원에서 제사를 지냈던 것도 이와 연관이 깊어 보인다. 우두연대는 한경면 용수리의 쇠머리코지(우두곶) 정상에 있던 연대로, 지금은 표지석과 흔적만 남아 있다.

당산봉(148m) 서쪽 봉우리(고산리 산43번지)에 위치했던 당산봉수(당산망)는, 동쪽으로 만조봉수(10.7㎞)와 남서쪽으로는 모슬봉수(14.5㎞)와 교신하였다.

만조봉수는 처음 판포봉(널개오름)에 있다가 한림읍 상명리 만조봉(느지리오름)으로 옮겨갔다. 당산봉수대가 위치했던 자리에는 오래전 전투경찰 해안초소가 설치되어 있다가, 지금은 통신탑이 들어서 있고, 봉수대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당산봉 정상 주변은 지평선과 수평선을 볼 수 있는 전망 좋은 자리로, 정상에는 원래부터 유명한 삼반석이란 바위가 놓여 있다.

삼반석은 크고 평평한 돌 셋을 일컫는 말로, 속칭 시돌굽이라 불리는 암반이다. 시돌은 세 개의 돌이라는 제주어이다. 오래전에는 이곳에 세 개의 돌이 하나의 암석처럼 층층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돌 사이로 실이 지나갈 만큼 미세한 틈이 있던 삼반석은 신비한 돌로 여겨져 여러 지리서에도 실려 있었다고 전한다. 언젠가 몰아친 태풍으로 돌들이 흩어진 이후 삼반석의 신통력도 사라졌다 한다.

최근에는 당산봉 정상의 삼반석과 영실의 오백장군석 그리고 차귀도의 막내장군석 등 세 바위를 바라보며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믿음도 전해온다.

닭의 볏 모양처럼 생긴 산이라 하여 계관산(鷄冠)산이라도 불리는 당산봉은 45만 년 전 마그마가 바닷물을 만나 폭발하여 만들어진 수성화산이다.

이후에도 당산봉 분화구 내부에서 화산 활동이 일어나 분석구(噴石丘)인 알오름이 형성되었다. 분석구에서 흘러나온 용암이 용수리 쪽으로 흐르면서 당산봉에는 말굽형 화산체가 만들어졌다.

특히 알오름 주변에는 수십만 년 전에 형성된 응회암이 오솔길 담장처럼 이어져 나그네를 신비로운 지질의 세계로 이끈다.

180만여 년 전에 형성된 제주도는 45억 년에 이르는 지구의 생성역사에 비하면 매우 어린 화산섬이다. 하지만 수많은 화산활동으로 매우 독특한 지형을 자랑하는 곳이 또한 제주도이다.

당산봉의 응회암 또한 특이하여 화산활동으로 분출한 화산재가 쌓여 만들어졌다고 한다.

반면 이 근방 대부분의 지형은 용암이 지하에서 뿜어져 나와 지표를 따라 흘러간 암석이고. 한라산보다도 먼저 수성화산으로 형성된 당산봉 주변에는 제주도에서도 가장 넓은 고산평야가 펼쳐진다.

고서에는 차귀평으로 기록된 고산평야는 당산봉과 수월봉, 차귀도 등에서 분출한 화산재가 용암대지를 덮으면서 만들어진 넓고 비옥한 대지이다.

특히 고산평야는 1만여 년 전 제주도에 처음으로 정착한 신석기인들의 삶의 터전이었고, 이로부터 제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