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폭발 후 생겨난 비옥한 대지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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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고산리 선사 유적지
1987년 주민 신고로 첫 발견
섬유질 혼합해서 만들어진
고산리식토기 국내 유일 확인
집터·화덕자리·갈돌 등 발굴
국가사적 제412호로 지정돼
고산리 유물 발굴 조사 모습. 사진=제주 고산리 유적 안내센터 제공
고산리 유물 발굴 조사 모습. <사진=제주 고산리 유적 안내센터 제공>

▲우리나라 최고의 신석기 유물산지 고산리 ‘자구내 뜬밭’

바다로 에워싼 듯한 제주도는 빙하기엔 대륙과 연결된 육지였다고 한다. 서해 깊은 곳의 수심이 50m 정도이니, 해수면이 150m나 내려가는 빙하기에는 대륙과 연결된 지금의 서해를 사람들은 걸어서 오갔을 것이다.

하지만 빙하기에 온 그들은 우리의 조상이 아니란다. 4만년 전 제주도에 건너와 애월읍 빌레못동굴 등지에서 거주한 사람들로 추정되는 구석기인들은 이미 사라지는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2만여 년 후 다시 찾아온 빙하기를 맞아야 했기 때문이다.

세월은 흘러 1만 8000여 년 전 고산리 수월봉 근처 바다에서도 화산폭발이 일어나고, 당산봉·수월봉·차귀도 등에서 분출된 화산재가 용암대지를 덮으면서 형성된 넓고 비옥한 대지 위에 드디어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

이곳 고산평야는 1만여 년 전 제주도에 처음으로 정착한 신석기인들의 삶의 터전이 되어 이로부터 제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흔히 ‘한장밭’으로 알려진 선사 유적지를 이 지역에서는 정확한 지명으로 ‘자구내 뜬밭’이라 부른다. ‘뜬밭’은 메마른 농토라는 의미이다. 기존에 알려진 한장밭이 아닌 자구내 뜬밭에서 1987년 이후 다량의 신석기 유물이 발견된 것이다.

제주도가 섬으로 형성되어 가는 시기에 이곳에 터 잡은 선사인들은 떼어내기 방식으로 소형의 돌화살촉과 돌망치 등의 석기류를 비롯하여 식물줄기를 보강제로 섞어 무늬 없는 토기를 만들었고, 후기에는 덧무늬 토기 등도 만들었다. 이러한 석기와 토기는 선사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제주도 최초의 도구일 것이다.

▲제주도에서만 확인되는 고산리식토기

1998년 국가사적 제412호로 지정된 고산리 유적(3628번지 일대)은 기원전 1만년에서 6000년 사이에 해당하는 신석기 시대의 생활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화산 활동에 의해 형성된 해발 14~20m의 평탄지역에 위치한 고산리 자구내 뜬밭 유적지는 우리나라 신석기문화를 기원전 1만년경으로 끌어올린 매우 중요한 곳이다.

1987년 고산리 주민의 신고로 이곳에서 유물유적이 최초로 발견된 이후, 수차례의 발굴조사 결과 이곳은 후기 구석기와 신석기 초기의 섬유질 토기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발굴된 유적지로 판명되었다.

이곳에서는 주거지, 화덕자리, 식료 가공 도구인 갈돌, 사냥도구인 석촉과 석창, 옥으로 만든 귀걸이 등이 발굴되었다. 특히 이곳에서만 확인된 신석기 초기의 섬유질 토기를 고산리식토기라고 한다.

이 토기는 풀과 같은 섬유질의 유기물을 혼합하여 만든 것으로, 소성(燒成) 후 유기물은 불에 타 없어지고 흔적만 내외 면에 남아 있단다.

고산리식토기.
고산리식토기.

이곳 유적은 1988년 제주대학교 박물관 팀에 의해 신석기 전기의 융기문토기(隆起文土器)가 발견됨으로써 비로소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곳은 오래전부터 자구내라는 하천이 바다로 흘렀던 1970년대에도 논농사가 대단위로 지어졌던 지역이다. 이곳의 신석기 유적은 자구내 서쪽 어귀에서 수월봉 앞에 이르는 해안단구에 남북 700m, 동서 100m의 장방형 지형에 자리하고 있다.

이 지역에는 평야지대와 함께 숲이 형성되어 사냥터뿐만 아니라 나무나 과일 열매를 얻을 수 있는 과원도 조성되었을 것이다. 또한 가까운 바다에서 소라와 전복 등의 각종 어패류를 손쉽게 구할 수도, 하천에서는 생활식수를 얻을 수도 있어 사람이 살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하겠다.

고산리 선사문화는 한림읍 금능리·제주시 용담동·조천읍 북촌리·구좌읍 김녕리와 종달리 등지로 널리 퍼져나갔다고 한다.

우리나라 신석기 최고의 유물산지인 이 지역에 대한 지속적인 발굴조사를 통하여 1만여 점의 유물이 발굴된 것을 계기로, 2015년 ‘고산리 유적 안내센터’가 건립되어 이곳의 가치를 알리고 있다.

제주고산리유적 안내센터에 있는 고산리 선사인 생활상 재연 모형.
제주고산리유적 안내센터에 있는 고산리 선사인 생활상 재연 모형.

▲석기시대로의 시간 여행

약 170만 년 전부터 해수면 아래에서 화산활동이 시작되어 16만 년 전에 한라산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12만 년 전에는 백록담이 형성되고, 10만 년 전부터는 화산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며 곳곳에 오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구석기 시대는 빙하시대와 간빙기 시대가 번갈아 있었던 시기로서, 빙하기에는 해수면이 낮아져서 제주도·한반도·중국대륙이 서로 연결되었던 시대이다.

이러한 생태환경의 변화로 인류는 물론 갈색곰과 사슴과 노루 등 다양한 동물들이 제주도에 들어와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살았던 시기에는 화산 활동 등으로 인한 자연재해가 많았으며, 또한 이상기후나 지각변동을 견디지 못하여 인간과 동물들은 모두 멸종되었다고 한다.

2만 년 전에는 빙하기가 되어 해수면이 지금보다 150m 정도 낮아져, 한반도·중국·일본이 연결되어 북쪽에 살던 사람들과 동물들이 제주도로 들어올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1만 년 전후로 하여 오늘날과 같은 해안선이 형성되어 제주도가 탄생되었다.

이원진 목사가 편찬한 탐라지(1653년)에 의하면, 오래전부터 고산리 지역에는 박은곶(所近藪)이라는 숲이 한라산에서부터 당산봉까지 이어졌었다고 전한다.

이로 보아 수월봉 평탄지역 위에 위치한 고산리 유적지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내가 흐르고 숲이 우거진 천혜의 환경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신석기 시대부터 농경이 시작되나, 제주도는 농사에 적합하지 않은 화산회토가 많아 고산리 선사인들은 사슴과 노루 같은 동물들을 잡기 위해 다양한 돌화살촉과 창을 만들었다.

그리고 화산 활동으로 이루어진 동굴과 바위그늘을 이용하여 집자리를 마련하는 등, 자연조건을 이용하면서 제주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 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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